09 포도나무처럼
올해 봄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요. 꿈을 꾸었거든요. 아버지와 숲속에 난 길을 가고 있었어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길을 부녀가 어떤 말도 없이 나란히 걷다가 갈림길에 이르렀네요. 그리고 제가 아버지께 고마웠다고 말하며 헤어졌어요.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꿈이라 여기기에는 어찌나 생생하던지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 장면이 또렷하게 남아있어요.
그리고 그 날 이후 저는 당신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아버지를 진정 보내드린거였어요.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딸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 이제 그만 아파해도 된다는, 토닥임 같은 것 아니었을까 싶거든요.
제가 아버지께 전하고 싶었던 것은, 고마웠고 사실은 당신을 사랑했다는 말이었다는 사실을 그 꿈을 꾸고나서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어요. 그것은 혼란과 방황의 시간을 끝내게 한 귀한 사건으로 기억이 되거든요. 아버지 떠나신 후 긴 애도의 시간을 보낸 셈이었어요.
부모님께서는 과수원을 하셨어요. 포도농사를 오래 지으셨죠. 좋은 포도는 팔아서 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어린 저희들은 팔고 남은 포도를 먹었어요. 그 중에서도 청포도는 송이가 볼품없는 것들도 포도주 회사에 팔 수 있었거든요. 그런 상황이니 청포도는 저희들에게 진짜 그림의 떡이 될 수 밖에 없었어요. 어머니께서 아버지 몰래 청포도를 조금 숨겨 두셨다가 먹여주셨던 기억이 있어요.
도회지에서 건강을 다쳐 고향집에 다니러 왔던 어느 해에 아버지께서는 산에 가셔서 진달래꽃을 꺽어오셔서 저에게 주셨어요. 겨울이 다 끝났나보다, 하시며 당신께서 내민 꽃가지에서 꽃잎 하나 따서 입안에 넣고 씹어 보았어요. 약간 시큼했던 맛이 났어요.
떠나시고나자 큰 사건들이 아니라 이런 자잘한 일들이 자주 기억나요. 아픔과 그리움이 꽃물이 번지듯 마음에 스며들곤 해요.
사랑으로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보내시고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깊은 사랑을 육신의 부모님을 통해 보았어요. 세상에 몸을 입고 와서 만나게 된 부모님 마음 깊이 흐르는 감정이 사랑인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면, 우리는 창세전에 사랑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거겠죠. 지상에 오기 전부터 우리는 모두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깊이 속한 존재였던거죠.
아버지 떠나신 후 캄캄한 골짜기를 끝없이 걷는 것 같았던 시간 끝에 자신을 안아 일으키시는 큰 존재를 느꼈어요. 스스로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저는 오래도록 그분을 찾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분은 내내 저를 기다리시고 부르셨겠죠. 그런데 자꾸 다른 방향을 보고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저를 마침내 돌려세우셨어요. 육신의 아버지께서 기도하셨으리라는 생각이 뒤늦게 듭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일 뿐이었죠. 부모님의 간절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탈하게 지내왔을리가 없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포도나무가 작은 덩굴손으로 지지대를 잡고 가지를 뻗어나가 마침내 달큼하고 향긋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아직은 연약한 저도 하나님 아버지 크고 놀라우신 사랑에 기대어 영원을 꿈꾸며 하루하루 믿음의 키를 돋우고 있어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