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읽는 기쁨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지 못한 시간이 석달은 된 것 같아요. 잠깐씩 펼치긴 했지만 기껏 몇 페이지 넘기고 말았을 뿐이었죠. 참, 갑갑하더군요. 사람 만나 수다 떠는 것도 취미가 없고 영화도 즐기지 않은 세월이 길고 그나마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독서와 산보 정도인데 그 중에서 책을 제외하고나니 생활이 심심하기 그지없어지더군요.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시간이 가지 않았고, 집안일에 몰두해보아도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고 이렇게 남아 있는 세월을 견뎌야 하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한숨이 나오더군요.
추석 연휴 끝날 무렵에서야 다시 책을 볼 의욕이 생기더군요. 연휴 마지막 날, 그 날이 찬이슬 내린다는 한로였어요, 근무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간단히 저녁 식사 마치고 설겆이 끝내고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빼들고 테이블에 앉았어요. 오랜만에 책을 펼친 마음이 처음사랑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고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몇 개월 만에 다시 펼친 책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예요. 스무살에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던 책이었고, 당시에 읽고나서 도무지 의미를 알지 못해 당혹스러움을 느꼈던 책. 그때 읽었던 번역본은 출판사와 번역자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현재 소장하고 있는 책은 최근 새롭게 출간된 번역본이예요.
한 문장씩 곱씹으며 천천히 독서해나갔어요. 여전히 의미는 깊고 어렵게 다가오지만 이제는 조금 잡힐 듯한 느낌이 들고, 무엇을 얻으려는 의도도 없이 그저 빠져드는 몰입감이 신선했어요. 분명 이런 기분 예전에도 맛보았겠지만, 세월의 어느 길목에서 잃어버렸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찾은 느낌이 들었어요.
무엇을 상실했고 무엇을 다시 찾은걸까요?...
책이라는 사물을 처음 만나게 되고 읽는 기쁨을 알게 되었을 때, 저에게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은 없었겠지요. 그저 읽는 행위가 좋아서 책을 보았겠죠. 지식을 습득하려는 계획도 없었고 성적에 보탬이 되겠거니 하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애초의 기쁨은 사라지고 책을 보는 목적성이 하나둘씩 생기더군요. 책을 선별하는 기준에도 실용성이라는 덕목을 얹게 되었구요. 이따금 책에 빠져들어 길을 잃었던 그 기분을 아련히 그리워했지만 돌아갈 수 없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다시 찾은 것 같아요.
읽는 기쁨, 그리고 살아가는 즐거움 말예요.
읽다보면, 살다보면, 또 잃어버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 몰입감을 흠뻑 즐기고 싶어요. 마치 옷이 젖는 것 따위 관심조차 없이 분수 아래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같은 심정으로 말이예요.
더이상 책을 사들이지 않겠다는 제 말에 기뻐하던 여동생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책이 제 일상에 느낌표이면서 쉼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 생각없이 좋으네요. 한 권의 책을 완독하겠다는 의도조차 없이 어느 문장은 몇 번을 반복해 읽고 어떤 페이지에서는 시간을 잊은 채 머무르고... 마치 계획없이 떠나 여기저기 헤매다니고 마음대로 머뭇거리는 여행처럼, 그저 즐기는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가을입니다. 그리고 지나간 어느 가을보다 읽는 기쁨을 누리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책읽기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