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인거죠

19 인생인거죠

by 크리스티나

고등학교 1학년때 난치병 진단을 받았어요. 투약과 치료가 그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병과 함께 한 세월이 어느덧 40년이 흘렀네요. 무너지는 저를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학교 영어선생님께서 어느 날 성당에 가자고 하셨어요. 검지손가락에 늘 묵주반지를 끼고 다니시던 분이었는데 볕이 좋던 일요일에 읍내 성당 앞에서 사모님과 함께 저를 기다리셨어요.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단 한 번도 자신으로서 받아들여진 기억이 없다 생각했는데, 긴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시절 그분의 마음은 사랑이었네요.


누구나 홀로 짊어져야 하는 인생의 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인생의 십자가는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난치질환이라 여겨집니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이들이 짐작하게 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있다할지라도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몫인 것 같거든요.


그래서 불행하다 느끼느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분명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고통이 불행과 동의어는 아니거든요. 그저, 인생인거죠.


시대의 화두가 '행복'이라는 단어로 집약될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행복 대신 불행을 선택할 사람들은 사실 없구요. 그렇지만 고통스럽다고 해서, 이 인생이 삶이 아닌건 아니죠.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병과 사투를 벌인 시간들이 펼쳐졌었구요. 그런데 사십을 넘어선 나이에 이르러, 이 지난한 삶도 해석하기 나름이라 생각하게 되었어요. 오랜 투약으로 신체의 다른 기관들에도 이상징후들이 뚜렷해진 시기에 이르러서 이만큼의 삶에 감사하게 되었거든요. 눈앞에서 세상의 문들이 차례로 닫힌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들어서게 되는 알 수 없는 길에서 발견하게 되는 인생의 아름다움도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진심으로 찾아 헤매던 진실 한 조각일지도 모르는거죠.


어제 날씨가 참, 화창했어요. 마지막 가을날 같았어요. 대낮에는 봄이 돌아온 듯했고 얼굴을 간지럽히고 지나가는 맑은 바람도 좋았어요. 산 아래 저수지 둘레길을 천천히, 오래, 걸었어요. 젊었고, 그래서 두려움이 컸던 시절에 들끓어오르던 마음도 이제는 잔잔한 수면처럼 고요해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티나'라는 한 권의 책을 제목만 흘깃 보고 떠나갔을 것이고 첫 페이지를 넘겨보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도 했겠지만, 쓸쓸하지는 않아요. 거세게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의연하게 통과해온 인생은 스스로를 믿는 마음이 있고, 세상의 모든 강한 존재들은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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