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처럼

18 흐르는 물처럼

by 크리스티나

퇴사후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길고 짧음에 대한 관념도 없이 그저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이 미치면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들이 떠올라 한 권씩 열어 보기는 해도 딱히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누구를 만나야겠다는 의욕도 없고 가보고 싶은 장소도 생각나지 않네요. 잘 먹고 밤이 깊어지면 잠들고 동이 틀 무렵 일어나 움직이는 단순한 생활의 리듬을 즐기고 있어요. 오늘 전직장에서 일한 마지막 몫을 정산 받았네요. 퇴직금까지 통장에 정확히 찍힌 것을 확인했거든요.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맴도는 하루였습니다.


제가 사는 읍에 천변이 있어요. 평상시에는 물이 찰방거리며 흐르는. 몇일 전에 그곳에 가보았거든요. 가을볕이 유난히 좋았던 날이었네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운동기구도 곳곳에 있었구요. 넘실거리는 가을햇살 얼굴에 받으며 땀이 날 만큼 걷고 또 걸었어요.


긴 세월이 흐르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구나! 이런게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담담히 했습니다. 이제 무엇도 마음에 부대끼는 것은 없는 나이가 되었어요. 나와 맞지 않으면 잠깐의 만남에 고개 숙이고 작별하면 그만일 뿐, 그 인연을 붙들고 있지는 않게 되었거든요. 인생이라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결국은 혼자 남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시절을 잠시 함께 하는 이들이 있어도 어떤 인연도 영원할 수는 없거든요. 이별의 모습도 다양하게 연출이 되죠.


천변 이야기를 했네요. 물이 좋다고 느낀 것은 아마 삼십대 후반 즈음이었을거예요. 서울 소재의 K대 근처에 살고 있었던 시절이었는데 그 대학 교정에 호수가 있었어요. 출근하기 전이나 쉬는 날에 호수 주변에 놓인 벤치에 앉아 찰랑거리는 물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그렇게 잔잔해질 수가 없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물이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디로든 흐를 수 있다는 단순함이 마음에 깊이, 들어왔어요.


'어디로든 흐를 수 있다'는 것이 어떤 경지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요즘 제 호흡이나 동작을 순간순간 의식하고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 숨을 멈추는지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어깨에 어떻게 힘이 들어가는지... 그런거요. 쓸데없이 몸에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오래 말아두었던 요가매트도 펼쳤구요. 공기가 흐르듯 숨을 쉬고 바람이 가듯 걸림없이 살고 싶어요.


자연스럽게!어디로든 흐르는 물처럼.

(퇴사 후 일상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려 합니다. 모든 분들의 건강과 건필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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