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0] 도전 : 1일 1글쓰기 - 프로젝트 '좋아해'
나는 컴퓨터로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고 있지만 디지털에 익숙한 편은 아니다. 원고나 자료를 검토할 때는 무조건 출력물로 뽑아 메모를 하며 정리를 한다. 그 편이 이해도가 높다. 좀 구식이라 그런가. 그때도 주로 사용하는 도구는 형광펜과 연필. 볼펜보다 샤프가 좋고, 샤프보다는 연필이 좋다.
연필이 왜 좋을까. 글을 쓰기에 앞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연필이 왜 좋지? 연필은 가볍다. 손에 쥐었을 때 두께가 적당하고, 쓸 때의 손으로 전달되는 마찰 진동이 좋다. 소리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칼로 슥슥 밀어 나무가 얇고 동그랗게 말리는 것도 멋있고, 연필깎이로 깎으면 예리하고 날카롭다. 그냥 나와 감성이 잘 맞는 도구다. 엥? 좋아하는 이유가 겨우 그거냐고? 사실 최초로 연필을 개발한 사람이 여자였다거나 흙연에 따라 색깔과 용도가 달라진다거나 또 브랜드마다 어떤 섬세함의 차이가 있는지 등 전문적인 지식과 디테일한 경험을 원한다면 책 <아무튼 연필>을 권한다. 나는 그냥 연필을 좋아하는 거지 연필 덕후는 아니다(오해는 말 것. 나는 아무튼 시리즈 광팬이다).
고양이는 귀여워서 좋다.
가을은 예쁜 계절이어서 좋다.
종이책은 낭만적이어서 좋고,
초록은 안심이 돼서 좋다.
엄빠는 그냥 엄빠라 좋다.
그렇게 연필도 그냥 나랑 감성이 잘 통해서 좋다.
생각이 느려서 행동도 느리고, 대답도 느리다. 5초 전에는 맞다고 생각했는데 10초 뒤에는 틀린 것 같을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선을 찍찍 긋고 그 위아래나 옆에 다시 쓰는 건 영 보기 싫지 않은가(나는 문서도 오와 열을 맞추는 데 병적이라 찍 긋고 적는 걸 무척 싫어한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 집에는 안 써서 잉크가 말라버린 펜이 여럿이다). 틀리도 쉽게 고쳐 쓸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그런데 또 연필 뒤에 달린 지우개는 성능이 엉망이어서 이걸 지우는 건지 번지게 할 심산인 건지 모르겠는데, 좀처럼 잘 지워지는 지우개로 바꾸지 않는 점도 어이없고 웃긴다. 실없는 농담이라도 보는 것 같다.
샤프도 마찬가지지 않느냐고? 한때 연필보다 샤프를 많이 쓰던 시절이 있었다. 이름처럼 가늘고 선명하게 써지는 게 세련됐지만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부러진 심들이 딸깍딸깍 누를 때마다 톡, 톡, 톡, 떨어진다거나 조금 불량한 건 출입구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헛돌아 샤프 머리를 빼서 확인을 해줘야 한다거나 오래 잡고 쓰면 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긴다는 점에서 자꾸 불편했다. 지우개로 지웠을 때 자국도 남는다.
연필은 쉽게 부러지지만 또 쉽게 부러지지 않는 점도 좋아한다. 가벼운 터치로도 종이에 닳고 닳지만 손바닥에 흙심을 박아 넣을 만큼 단단하기도 하다. 연필의 이러한 외유내강의 성질은 사용을 하는 순간에 나에게로 흘러 들어온다. 긴가민가, 이 방법이 맞을까 저게 맞을까,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볼까. 연필을 잡고 씨름을 하다 보면 유연한 생각이 피어오르고 단단한 결심을 하게 된 게 여러 번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어도 연필 덕에 지우고 다시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다. 끝이 뭉툭해지면 다시 예리하게 갈아내고 생각의 촉을 세운다. 그 과정 속에서 연필은 나와 함께 최선의 선택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직까지는 항상 옳았다. 이래도 아직 내가 연필을 좋아하는 이유가 시시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