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연애의 시작
연애의 시작이 쉽지만은 않았다. 20년을 넘게 영어를 배웠지만 그 누구도 썸을 탈 때 남자들이 하는 말, 그린라이트인 말들을 알려주지 않았다. 미국 드라마를 더 챙겨봤어야 했나 잠시 생각해봐도 내가 즐겨보는 장르가 영 연애와는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늘 총을 들고 다니는 주인공이거나, 전쟁 중이거나, 둘 중 하나가 스파이거나 했으니까 말이다.
식스 플래그 이후 우리는 더 자주 연락했다. 가끔 일상이 담긴 사진을 주고받거나 전화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썸을 타는 건가? 고민해도 한국 남자들과는 다른 전개에 에이- 아니겠지 하기 십상이었다.
1. 썸인 듯 썸 아닌 듯한 연락
그 첫 번째가 연락 문제였다. 한국은 보통 소개를 받고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에서 연락을 참 많이 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만나고 사귀기 전까지 잠자는 시간 빼고는 늘 휴대폰을 손에 쥐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할 말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약간의 의무감,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소개해준 사람에 대한 예의로 연락이 오면 답장을 해주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연락은 늘 퇴근 후 잠들기 직전 기껏해야 한, 두 시간이었다. 10시가 조금 지나면 이제 자야겠다며 문자를 끝마치는 그의 모습에 썸은 아닐 것 같은데? 생각했다.
2. 그린라이트, 고백의 말
그리고 나를 수 없이 많은 고민에 빠뜨렸던 것 중 하나가 '말'이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에 말만 듣고 이 사람의 진심을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모르는 표현들까지.... 그중 결정적인 말이 go out이었다. date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go out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는데, 맨 처음엔 어디 나가자는 얘긴가 했다. 영어를 잘하는 누군가 이 글을 보고 그걸 왜 몰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이 어떻게 '사귀다'라는 뜻이 되는지 사실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간다. 쨌든 그도 go out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고백했다. 물론, 나는 못 알아들었고.
이런 불안과 긴가민가한 마음을 안고 매일을 보내다 어느 날 그의 집으로 초대 받게 되었다.
그는 뉴욕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족 그리고 7마리의 강아지들과 함께. 원래는 이렇게 많지 않았는데 새끼를 낳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며 난장판이지만 다들 사이좋게 잘 지낸다 말하고 웃는 모습에 심쿵했던 기억이 난다.
집 뒷마당에 자쿠지가 있으니 베딩 슈트를 가져오라는 문자를 초대받던 날 받았는데, 응? 베딩 슈트? 내가 생각하는 그런 수영복? 그걸 말하는 게 맞아? 비키니? 그런 거? 라며 오만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녔고 평소엔 생각도 않던 유교사상이 떠오르고 혼자 집에서 안절부절못했었다. 그러나 대망의 날, 내가 정말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하며 민망해할 정도로 건전한(강아지들도 함께 뛰어노는) 분위기에 자쿠지에서 몸을 녹였고 부모님도 집에 다 계셔서 인사도 드리고, 맛있는 저녁도 함께 먹었다. (내가 너무 선정적인 드라마를 많이 봤나-싶더라.)
이날이었을까, 내가 어쩌면 색안경을 끼고 이 친구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생각이 들었던 게.
* 미국에서 본인 집에 친구를 초대하는 건 한국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인 것 같다. 한국에서 이성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건 내가 이 사람을 결혼 상대로 생각한다.라는 의미이거나 그에 준할 정도로 진지하게 오랜 시간 교제하고 있다.의 의미인 경우가 많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또, 미국에서는 딱히 '사귀자'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연애를 시작하는 커플이 많기 때문에 무작정 go out을 외쳐주기만을 기다렸다간 상처받을 수 있다.
* He said, 가장 정확한건 남자, 여자 할 것없이 서로의 관계에 대해 궁금한 쪽이 상대방에게 솔직한 마음으로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이 때, 얼버무리거나 이상한 요구를 하거나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면 바로 끊어내도록. 옐로우피버 생각보다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