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도 서서히 선영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건지, 말하는 틈 속마다 가시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러했다.
"정수가 당신 친자가 아닌 것 같아! 아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대체 진실이 뭐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선영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선영의 과거를 눈치챈 남편의 꼬투리는 본인의 부도덕한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기연가미연가한 투로 말을 뱉곤 했지만, 알아보기라도 했던지 선영의 과거라 말하는 약점을 콕콕 찔렀다. 진심인 척했던 잠자리도 스스로 회피했다. 선영이 왜 그러냐며 타박을 하면, 사업이 힘들어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일 년 전에 시작한 전복 양식장 사업이었다. 직장 생활을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남편이 사업을 해 보겠다며 계획서를 내밀었을 때, 선영은 선뜻 아파트 한 채 가격을 사업계획서와 바꿨다. 남편의 기를 살려준다는 명목과 사업을 하면 책임감을 느끼고 매달리겠지 하는 생각들이 사업을 허락한 것이다. 그리고 일체 사업에 상관하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날 무렵,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았냐는 선영의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남편의 사업은 일 년 만에 거덜 나기 일보 직전이었고, 사업의 고전 이유는 전례 없는 고수온과 자금 부족을 들먹이며 두루뭉술했다. 덧붙여 자금이 턱없이 모자란다는 말을 입에 거품이 날 정도로 강조했다. 이 말을 듣고 선영은 속았던지 속은 척 한 건지 사업 초기 자금의 두 배에 해당하는 돈을 주었다. 남편의 변화가 사업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아무튼 당시엔 결혼이 파국으로 가는 게 싫었다. 그런 선영의 바람과 다르게 남편은 돈을 가져간 뒤에 노골적으로 외도를 했다. 셔츠에 화장품 냄새와 여자 머리카락을 묻혀 오기도 했고, 급기야 선영 앞에서 외간 여자와 버젓이 통화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성을 잃은 선영은 요란한 전망을 떠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선영의 타박에 비례해 남편의 술주정과 욕지거리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때까지도 선영은 이혼을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또 남편의 여자와 마주 앉았다. 선영 앞에 앉은 여자는 당당했다. 예전 물세례의 앙갚음이라도 하려는지 입을 앙다물고 선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여자를 선영은 몰라봤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자 명품을 걸치고 화장품을 진하게 처발라 몰라봤다는 걸 알았다. 그 여자가 이 여자라는 걸 안 선영은 순간 치솟는 화를 다스리며 종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도 어찌하지 못했을 터였으리라. 테이블 위 물컵이 또 여자의 얼굴에 뿌려졌다. 졸지에 당한 여자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씩씩거렸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선영 앞에 모가지가 잡혀 바둥거리는 암탉이었다.
"가세 주리를 틀어도 시원찮을 너희 연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각오해! 제 명에 못 살게 해 줄 테니…."
선영은 여자의 얼굴 앞에 삿대질하며 악담을 퍼부었다. 이후 선영은 남편이 저지른 많은 법적 엇나간 일들을 정리해 이혼 절차에 들어갔다. 흡족한 수임료에 만족을 표시하며 변호사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선영을 안심시켰다. 법원이 이혼을 선언하자 선영은 한 번 더 남편을 올가미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변호사는 또 걱정하지 마시라며 웃었다. 그렇게 넌더리 나는 결혼 생활을 끝낸 선영은 기생충을 떨어뜨려 준 법정에 감사했다. 하지만 남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이미 심장이며 창자며 머릿속까지 촌집 부엌처럼 온통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 때문에 팔자에 행복은 없겠거니 하며 그냥저냥 홀로 즐기며 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떠나 온 여행이었다. 삼 년 전 그때도 막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는 철부선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태워달라 애원을 하자 뱃머리를 돌려 선영을 태워주었다. 그때만 해도 섬 여행객이 많지 않아 한 사람이라도, 자동차 한 대라도 더 태우고 실어야 적자 운행을 면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섬 여행에서 천국은 멀리 있지 않음을 느꼈던 기억이 삼 년 만에 선영을 불러들인 것이다.
야속하게 떠나버린 철부선을 바라보며 선영은 삶의 계급장이 되어 흉터로 남아있는 결혼 생활이 떠올라 삼 년 전 이혼 여행을 부스럭 들춰본다….
2.
"휴! 조금만 늦었어도 이 배를 못 탈 뻔했네. 다음 배는 네 시간 뒤에나 있는데."
애원 끝에 배에 오른 선영은 갑판으로 올라가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섬을 향해 자맥질하는 배에는 시끄럽지 않은 편안함이 있다. 하지만 손익분기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게 불만인 철부선은 연신 투덜거렸다. 그 탓에 난간에 매달려 토악질하는 노인, 그 노인의 등을 두드리는 또 다른 노인, 새우 과자로 갈매기를 유혹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일가족, 그리고 객실에 앉아 졸고 있는 한껏 멋을 낸 50대의 여자, 이 여자는 언밸런스한 옷차림으로 보아 기실 섬 아낙일 터였다. 그리고 똑같은 작업복을 입은 남자 몇, 이렇게 고작 여남은 명의 손님들은 배의 경제 사정은 내 알 바 아니라며 즐거워했다. 선영도 객실에서 나와 갑판에 앉았다. 시선 안의 모든 풍광이 가관이다.
크고 작은 섬의 만장단애, 섬 산을 태우는 붉은 가을. 일망무제 대해 위에 떠도는 순백 구름. 태양이 만든 윤슬, 이 모든 것이 그림을 보는 듯 점입가경이다. 배가 지날 때마다 바뀌는 그림은 마치 갤러리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벽에 걸린 작품을 감상하는 호사였다. 그때 갑판에 요란함이 일었다. 배 옆에 바투 붙어 유영하는 상괭이들이 사람들을 환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천국의 모습을 한 섬 생연도에 상괭이라 불리는 희한한 놈이 산다는 것을 티브이에서 보고 처음 들어본 이상한 바다 동물의 이름과 특이한 생김새에 선영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웃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티브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가식적인 얼굴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녀석이 보고 싶다는 생각과 웃음의 진위를 알고 싶어 떠나온 여행, 생연도에는 정말 웃는 상괭이가 살고 있었다. 녀석의 웃음이 가식적이든 행복한 웃음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이 임계점에 다다라 너절한 파국에 빠진 현실 속에서도 어쨌든 녀석의 웃음은 상투적으로 되어버린 슬픔을 잠시나마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노인의 인자한 표정 같기도 하고 해맑은 아이들 얼굴 같기도 한 상괭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선영도 사람들 틈에 끼어 찬탄을 자아냈다.
"천국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선영의 혼잣말에 과자로 갈매기를 유혹하던 여인이 선영의 옆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다. 선영의 넋두리를 들은 것이다. 선영은 생각했다. 해양학자나 어부가 아니고서야 상괭이라는 고유명사를 입에 올리며 녀석들을 본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그런데 지금 이 희귀한 생명을 보며 억지웃음이나마 지을 수 있으니 이곳이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천국은 선하게 산 사람들만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님을 깨닫는다. 구지레한 삶에 구곡간장이 녹아들더라도 모든 건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니, 밖으로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속 것들을 다스리면 될 일이다. 그러다 보면 아물 것이고, 그럴 땐 빗장을 풀고 사부작거리다 보면 이런 호사도 누리게 되니, 이게 천국인 것이다. 바다에는 상괭이, 하늘에는 갈매기, 이 생명의 우아한 비행과 유영을 바라보며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선영이다. 그때 천국에 있던 선영이 세상의 묘한 시선을 감지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곳엔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선영을 쳐다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필시 이혼을 당했거나 실연했거나, 그도 아니면 쫓겨 다니는 계주일 것으로 생각하는 야릇한 시선이었다.
차림새는 도시 여자이거늘 홀로 먼 섬까지 잠행하는 듯한 선영은 사내들의 편견의 희생양이었다. 은근 불쾌감을 느낀 선영은 그들의 오지랖에 순응하며 선실로 들어간다….
"그래!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 그런 여자다…."
하지만 목소리는 목구멍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육지에서 도망쳐온 철부선은 파도에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다. 섬에 잡혀 다시 밧줄에 묶였다. 과자의 유혹에 섬까지 따라온 갈매기들도 또 다른 갈매기 떼에 섞여 날기에 바쁘다. 배에서 내린 몇 되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자취를 감춰 포구는 본연의 고요를 되찾았다. 선영이 선착장을 빙 둘러본다. 하릴없어 보이는 잠자리의 날갯짓 아래 길고양이 한 마리가 빨랫줄에 널린 생선을 올려다본다. 입맛을 다지는 그 모양이 처연하다.
선영은 포구 한 편의 낡은 건물로 다가갔다. 유리문에 쓰인 해물 라면이라는 글씨가 아침도 거른 시장기를 자극했다. 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낯익은 아낙이 선영을 맞는다.
"어서 오 쇼이~~"
사투리에 정감을 느낀 선영이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덩달아 사투리로 화답한다….
"여그 뭐가 맛있단가요?"
벽에 붙은 메뉴를 쳐다보며 질문을 한 선영에게 아낙은 물컵을 탁자 위에 놓으며 너스레를 떤다.
"오메! 세련된 게 서울 사람인가 혔드만 여그 사람인 갑디요?"
"네, 전라도가 고향이긴 헌디 서울서 오래 살아 사투리를 잊었지라. 그란디 이 짝에만 오면 지도 모르게 사투리가 봉숭아 꽃맨치로 톡톡 터져 나온단게요."
선영은 사투리로 화답하는 자신이 생뚱맞아 웃음이 나왔다.
"헌데 방금 배 타고 오지 않았어라? 나가 피곤혀서 객실에서 잠이 들었는디 꿈에서 봤는지 배에서 봤는지 가물가물 하단게."
"네, 지도 아줌니 배에서 봤고만이라..."
"고로고만이라... 섬 구석에 이렇게 살지만 않았어도 요로코롬 총기가 시름 시름하지는 않을 터인디. 요새는 아까 일도 생각이 나덜 않고 저그 물마루 맨치로 아득 허기만 혀뿌요! 워쩌것소? 이거이 나 팔자인디."
아낙의 목소리가 그렁그렁하다. 아낙의 한탄 섞인 사투리에 선영은 가슴이 턱 하고 막혀온다. 울컥 눈자위에 끈적임이 느껴졌다.
"저 손님들 드시는 게 해물 라면이죠? 저도 같은 거 주세요!"
선영은 다시 서울 사람으로 돌아가 주문을 했다.
"그라요, 쪼매 기다리쇼. 그란디 이 쬐깐한 섬에 뭐 하러 왔소?"
"상괭이 보러 왔습니다."
"뭐시라, 긍께 상괭이라 혔소이? 그놈들 보고 자파 서울서 여그까지 왔단 말이단가?."
"네, 녀석들 웃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요. 어떻게 살면 행복하게 웃으며 살 수 있을까 배우려고요."
신영이 라면 그릇에 젓가락을 담그며 농담을 건넸다.
"그라 지라~ 그 놈들이 행복하긴 한갑디요. 허구한 날 실실 대는 거 본께 사는 모양이 사람보다 낫소.."
"이 녀석들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글씨 이놈들이 남정네들 같아부러 도통 짐작 할 수가 없소이.. 매일 나타나기도 했다가 어느 짝엔 매 칠 씩 코빼기도 안 보이고... 사람이나 이놈이나 요로코롬 들쑥날쑥 허요."
상괭이를 빗댄 신세 한탄이었고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었으리라. 그런데도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모습이 옷차림에 묻어 있었다. 붉은 입술도 상괭이 같은 남정네를 맞이하기 위함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괭이 보고 싶다고 하신 것 같은데…. 그럼 해 질 녘 금덕리 방파제에 가보세요! 오늘 물이 얌전해서 나타날지도 모르겠네요!"
배에서 자신을 보며 빙그레 웃던 여인이 가족들과 식사를 마치고 나가며 넌지시 일러준다….
심심하지 않은 식사를 마친 선영도 계산하고 나오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 먹은 음식이 라면일까 해물탕일까? 음식의 정체성을 유추해 보다가 유리문에 쓰인 해물 라면은 해물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자 흡족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섬이라 그런가? 아니면 저 여자의 손이 큰 건가? 아니지, 섬 인심이야."
포만감으로 한결 기분이 좋아진 선영이 섬을 사부작거린다. 몽돌밭에 앉아 장난도 쳐 보다가 아무도 들른 적 없는 백사장에 오롯이 자신만의 발자국을 남기기도 하고, 금계국 흐드러진 꽃 속에 묻혀 카메라 속 미모를 뽐내 보기도 하는 선영의 가을은 이혼의 상흔을 치유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세상일로 생각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거늘, 세상 밖 세상 같은 섬에 찾아드니 세상일은 뒤에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내 뒷모습은 내 것이 아니야. 뒷모습을 보려고 애쓸 필요 없어!"
한가로이 해변을 산책하던 선영이 무연히 바다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한다. 해 질 녘 방파제에는 배에서 보았던 오지랖의 사내들이 늦은 오후를 낚고 있었다. 그들의 긴 낚싯대에는 붉은 노을이 연신 낚여 올라왔다. 멀찌가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선영의 시선이 발아래로 옮겨진다. 파도 소리와 사뭇 다른 첨벙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상괭이 가족이 해면에 깔린 노을을 해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 얘들아…. 감동이다. 배에서 그리고 방파제에서 자신 앞에 나타나 주는 녀석들을 보며 선영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하지만 웃고 있는 녀석들을 보니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행복하니? 나도 너희들처럼 행복해지고 싶어!"
선영은 방파제에 쪼그려 앉아 녀석들을 바라보며 환경이 만들어 준 잠깐의 행복에 젖어본다. 한낱 짐승도 가족을 거느리고 웃으며 살아가거늘, 행복이란 게 이리도 움켜쥐기 어려운 것인가? 자신의 삶에 애련함을 느끼는 선영이다. 그렇지만 예순도 아니고 쉰도 아니고 기껏 마흔 줄에 들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애면글면 행복을 쌓으리라 희망을 품어 본다. 사랑이란 더 꿈꾸지 않을 것이고, 그저 소실해 가는 것들만 없다면 무념하게 살리라 다짐해 본다. 웃고 있는 상괭이로부터의 배움이다….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상괭이로부터 웃음을 찾은 선영이 해변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배에서 그리고 라면집에서 마주한 여인이 카메라를 맡긴다. 카메라를 건네받은 선영의 눈에 보이는 뷰파인더에 이 가족의 행복을 비집고 들어올 풍경은 없었다.
"상괭이와 이 가족의 행복을 조금만 가져왔으면….".
곳곳에 널린 행복이 부러운 선영이다.
상괭이도 떠나고, 비릿한 세월을 낚던 사내들도 떠나고, 노을도 떠난 자리에 어둠이 내려앉아 섬은 적요에 빠졌다. 선영도 방파제를 등지자 고양이 몇 마리가 사내들이 두고 간 물고기로 만찬을 즐긴다. 넓은 오지랖처럼 마음 씀씀이도 넓은 사내들이다. 숙소로 돌아온 선영이 창틀에 턱을 괴고 배들의 귀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수염이 덥수룩한 험상궂은 사내가 라면집 문을 슬그머니 밀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염려가 들어있는 듯 동작이 민첩했다. 그의 손에 든 망태기가 무거워 보인다.
"누굴까 저 사내는, 상괭이처럼 종잡을 수 없다던 그 사내?"
선영의 오지랖도 사내들처럼 넓기도 하다. 숙소에 들어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선영은 섬의 고요에 치를 떤다. 어떤 문학적 수사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섬의 밤이다. 결국, 술로 버텨야 했다. 한 잔, 두 잔. 알코올의 알싸함이 목구멍을 자극하며 뱃속에 안착할 때마다 고독도 술잔의 수만큼 쌓여간다.
잠깐 느꼈던 행복도 지쳐만 가고 의식은 통제선 밖에서 깜박거린다. 눈가엔 눈물이 가랑가랑하다.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눈물, 이것은 선영의 의지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쪼르르 술병에서 술 떨어지는 소리가 처연하기만 하다. 선영이 술잔을 넘기고 해삼 한 토막 우물거리며 취한 듯 중얼거린다.
"그래, 이 쓸쓸한 바다에서 그 어느 누가 고독에 빠지지 않을 텐가.
파도 소리가 가슴을 후벼 파는 이 외로운 섬에 흘러들어 달이 빠진 바다를 오도카니 바라보고 있는 지금 추레한 새벽 1시의 난숙한 고독 앞에 어찌 눈물 흘리지 않을 텐가. 고독한 밤에 눈물이 없다는 건 고독에 대한 모욕이기에 나 오늘 밤만 실컷 울어주련다."
선영의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창밖으로 달아난 울음을 파도 소리가 낚아챈다.
선영이 막 개들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깼을 때 포구는 어선의 분주함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침대에서 눈만 빼꼼히 내밀고 바다를 바라본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 날 위에 목화솜 같은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가히 하늘은 높았고 파랬다.
"바다네, 눈을 뜨니 바다가 내 옆에 있네? 그래 행복이 별 건가 바로 이런 게 행복이지."
슬퍼했다가 행복해했다가 마음이 죽 끓는 듯하다. 자고 일어나니 사뭇 달라진 마음에 희색 만연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밤이면 또 눈물 찍어 내리라.
"모두 버리는 거야! 김칫독 맨 아래 오래 묵은 시큼한 김치처럼 남아있는 기억의 독을 깨끗이 비우는 거야! 꽃잎의 이슬이 물방울로 응집되어 떨어지는 짧은 기억도 모두 버리고 기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거야!"
선영은 간밤의 슬픔을 화장으로 덧칠하고 숙소를 벗어났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부랴 사랴 섬 산에 오를 채비 한다.
"나 치르치즈에 파랑새를 알아요…. "
방파제에는 이제 바빠졌는지 오지랖보다 인정이 넓은 사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떠난 곳에는 자신에게 카메라를 맡겼던 여인이 고기를 굽고 있었고 그의 남편인듯한 남자가 사내들처럼 낚싯대로 무언가 열심히 낚고 있었다. 그 옆 딸들은 연신 함박웃음을 짓는데 그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섬을 떠나는 철부선은 얌전했다. 무수히 많은 섬이 배 옆을 스쳐 지난다. 철 부선이 뭍을 향해 가는 동안 고만고만한 섬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마치 훌륭한 공연의 커튼콜 같았다. 섬을 떠나온 막 배가 뭍에 도착하자 바다에 이어 하늘에서도 별들의 공연이 시작됐다. 복잡한 세상이 아니었으니 별들의 공연은 더욱 빛났다. 선영은 나직이 어느 시인의 시를 읊어본다.
"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 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이어폰을 귀에 꽂자 소녀 감성이 돋아난 것일까 다시금 눈자위가 붉어진다.
"이렇게 쉬 천국에 갈 수 있는데, 천국은 멀리 있지도 않고 갈 수 없는 곳도 아니고 삶 가운데 있거늘, 비 온 뒤의 맑은 하늘도, 얼었던 계절 뒤에 찾아오는 푸석함도, 허기를 채운 뒤의 포만감도 생각하기에 따라 모두 천국이 아닐는지…."
삼 년 전 여행의 회상에 빠져있나 보니 두 시간이 삽시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