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웃는 상괭이가 산다

6. 두 번째 첫사랑

by 소안

영민이 방에 들어온 미영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놓칠 뻔했다.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미영은 그림에 얼굴을 바싹 대고 찬찬히 살폈다.

"생연도의 추억"이라는 제목 아래 사인은 분명 자신이 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 여름날 가게 앞 평상에 앉아 하루의 끄트머리를 그린 것이었다.

대학생들의 캠프파이어에 부러워하며 그 무리에 끼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했던 때였다.


“이 그림은 그때 그 사람이 갖고 싶어 해서 준 건데,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걸려 있지?”


미영은 어슴푸레하게 그림을 준 대학생의 얼굴을 떠올려 봤으나 영민과 연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영민 씨, 이 그림 어디서 났어요?”


“글쎄요, 저도…”


“아, 미안해요.”


물으나 마나 한 걸 물어본 미영은 머쓱해하며 시선을 다시 그림으로 옮긴다.


"왜요, 아는 그림인가요? 가만, 그러고 보니 여기 사인이 미영 씨 이름… 그럼 이 그림을 미영 씨가 그린 건가요?"


영민도 놀라운 듯 동생을 부르며 방을 나간다. 그림의 기억을 동생으로부터 찾기 위함이었다.

그림을 손으로 쓸어내는 미영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20호 화폭을 가득 채운 붉게 산화하는 태양. 노을빛을 닮은 해변의 모닥불, 지는 태양과 반대로 치솟는 젊음을 그려 넣은 게 불과 4년 전이었다.


"형이 낙도 봉사활동 갔다가 가지고 온 건데, 봉사 갔던 섬에 사는 아가씨가 그린 거 선물 받았다 했어."


"그런데 영식 씨, 내가 이 그림은 준 사람은 영민 씨가 아니에요!"


"형이 낙도 봉사활동 다녀와 입대했고, 제대 후 사고를 당했어요. 그 사고로 형이 이렇게 되었고요, 얼굴까지 심하게 다쳐서 수술까지 크게 한 건 아시죠? 그래서 몰라보실 수 있을 거예요!"


미영은 영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당황해할 뿐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친구들이 영민이라 부르던 어렴풋한 기억이 나네요! 영민 씨, 잠깐 손 좀 줘 보세요!"


영민이 영문을 몰라하며 손을 내밀었다. 영민의 손에는 무려 15 바늘이나 꿰맨 그날의 흔적이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아! 이 사람이… 영민 씨! 나 모르겠어요? 그때 생각 전혀 안 나세요?" 미영은 영민의 기억을 나무랐다. 가슴이 먹먹했고 눈자위가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날 형이 손에 붕대를 감고 왔어요! 어머니도 놀라 다그쳤죠, 왜 손을 다쳐서 들어왔냐며...


영민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미영을 바라보며 초기화된 자신의 기억을 불편해한다.


"미영아, 너그집도 손볼 때 있다고 안 혔냐?

여그 학생들이 왔응께 어디 고칠 건지 알려주거라."


영민도 그때 할아버지가 데리고 온 한 무리의 대학생 가운데 있었다.


"나이도 많지만 돈도 많아."


생각과 다르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발길을 돌렸던 그날 이후, 영민은 소희를 잊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던 중 방학을 맞아 귀국하여 낙도 봉사 활동에 참가한 것이었다.


"어제 카드 안 된다며 술과 먹을 거 공짜로 주셨죠? 보답을 해야 하니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고쳐야 하는 게 뭔가요?"


"어머, 그거에 대한 보답이라면 사양하고 싶은데요?"


미영이 영민의 너스레에 농담으로 화답하며 미소 짓는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쁘십니다."


"그런데 비 새는 지붕도 고칠 수 있으세요?"


"그럼요, 젊은데 뭘 못하겠습니까?"


"야, 영민이 너 다른 맘먹고 여기 온 거 아냐? 지붕 고치는 건 핑계 같은데, "


"헛소리하지 말고 사다리나 꽉 잡아 안마!"


영민이 지붕을 고치고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악..."


오래된 지붕은 영민의 묵직한 몸뚱이를 견디지 못했다. 다행히 섬 특유의 지붕이 낮은 집이라 몸뚱이는 멀쩡했다. 그런데 손바닥이 무엇에 찢긴 것인지 피가 철철 흘러 바닥이 금방 피로 얼룩졌다. 미영이 놀라 영민의 손을 수건으로 감쌌다. 동료 대학생들도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데, 미영은 영민의 손을 감싸 쥐고 보건소로 달려간다.


교도소에서 나와 아이를 건달의 차 안에 내려놓고 도망갈 때보다 더 급박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고 다리가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자신 때문에 젊은 대학생이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어찌 급하지 않을 텐가? 손등을 감싼 수건이 피고 흥건하게 젖었다.


"저기 좀 천천히--"


영민의 말도 개의치 않고 미영은 사력을 다해 뛰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다행히 혈관은 피했네요. 15바늘이나 꿰맸습니다. 신경을 쓰긴 했는데 흉터가 안 생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공중보건의의 말에도 미영은 붕대로 감싼 영민의 손을 보여 발만 동동 굴렀다.


하늘은 바다처럼 파랬다. 가게에 앉아 해변을 바라보던 미영이 힐끗 지붕을 올려다본다. 몸뚱어리가 들락거려도 될 것 같은 뻥 뚫린 지붕 위로 파란 하늘을 수놓은 구름이 유유자작거리고 있다. 미영은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조그만 구멍 메우고 구름 하나 통째로 들어오는 창을 만들었네? 그나저나 호미로 막아도 될 일을 가래로 막게 생겼네? 저 큰 구멍을 어떻게 매워야 하나..."


가게 앞 해변엔 봉사 활동 온 학생들이 또 빙둘러앉아 맥주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손에 하얀 붕대를 감은 영민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미영에게 다가왔다.


"놀라셨죠? 도움을 드리려고 했던 게 오히려 피해만 줬네요."


"무슨 말씀을요, 제가 더 미안하죠. 이렇게 손까지 다치게 했으니..."


"그나저나 지붕은 고쳐야 하니까 내일 다시 올라가 완벽하게 고려드릴게요! 이번엔 깡마른 친구를 올려 보내겠습니다."


영민이 머쓱해하며 미영을 슬쩍 쳐다본다.


"이거 가져가세요. 현금 없는 거 아니까 돈은 안 받을게요. 오늘 저희 집 고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파는 물건 이외는 딱히 대접해 드릴 게 없네요!"


"아닙니다. 현금은 없지만 계좌이체 하려고 했습니다."


"전 계좌도 없으니 그냥 가져가세요! 참, 손이 그래서 못 들고 가시겠구나. 가시죠, 제가 들어 드릴게요!"


맥주를 가득 담은 봉지를 양손에 들고 가는 미영 뒤에서 영민이 하나를 낙궈챈다.


"한 손은 멀쩡합니다."


같이 놀자는 학생들의 제의를 사양하고 가게로 돌아온 미영이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본다.

속 마음은 그러고 싶었다. 대학생들 틈에 섞여 맥주를 마시며 섬에 불어오는 바람의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생들과 나누는 대화에는 낄 자신이 없어 극구 사양했다.

영민의 체면만 세워주고 돌아왔다.

평상에 앉아 그들을 무연히 바라보는 미영은 그들의 낭만 앞에 가슴속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젊은 시절을 젊은 시절답게 살고 싶은 욕망이었다.


이튿날, 학생들은 또 지붕을 고치느라 분주했다. 그 모습들이 마치 유치원 꼬마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를 지켜보는 미영은 무슨 일이 생길까 심장이 조릿조릿했지만, 염려와 달리 지붕은 깔끔하게 고쳐졌다. 미영이 끓여준 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학생들이 해변에 둘러앉아 젊음을 만끽한다. 서쪽 바다에 해넘이가 분주하다. 태양은 바다에 더 붉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남은 힘을 아끼지 않는다.

미영이 이젤을 들고 나와 그들을 향해 펼쳤다. 고아원 시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 경진대회에 나가면 늘 입상을 했던 미영이었다. 그런 미영이 섬에 들어오고 난 뒤 유일한 취미 생활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림 그리는 게 취미 생활이 됐다는 건 슬픔이 상투적이 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팔레트에 물감을 짜던 미영에게 영민이 다가와 너스레를 떤다.


"그림을 그리시는군요! 노을과 그림 그리는 여인, 이 모습에 그림입니다."


"손 아프죠? 어쩌죠, 집에 가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이까짓 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오히려 미안해지는군요! 그런데 저기 해식애와 노을 진 바다, 그림의 소재로 더할 나위 없네요!"


"20세기 추상미술의 대가 모네에게 수련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 있는 그림의 소재였던 것처럼, 제게도 이곳 노을이 제 그림의 단골 소재입니다. 지금처럼 해변에 여러분 같은 젊음이 있으면 더욱 좋고요."


"예! 참 아름답습니다. 나중에 여행으로 다시 오보고 싶습니다."


바다는 어스름이 지기 시작했고 고즈넉한 적막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 섬에서 혼자 살면 의롭지 않으세요? 여기에 젊은 사람들도 없었데?"


네, 맞아요. 친구도 심지어 말동무할 사람도 없어요. 가계에 손님이 없을 때는 종일 말 한마디 안 하는 날도 허다하죠. 유일한 친구라면 가끔 찾아오는 상괭이 가족이죠. 그 녀석들이 나타나면 저기 방파제로 막 뛰어가 녀석들을 향해 말을 건넵니다. 그래도 답답하면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하는데, 그러고 나면 한결 기분이 좋아져요!


"알 것 같습니다. 외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어느새 노을이 사라졌네요. 아낌없이 자신을 불태우더니 흔적도 남기지 않았네요!"


해변이 어둠에 휩싸였다. 물놀이하던 학생들도 지친 건지 백사장에 드러누워 하늘을 본다.


"중학교 때였어요! 어렵사리 돈을 모아 비싼 물감을 샀거든요! 그런데 미술 시간에 물감을 짜는데 나오지 않는 거예요. 오래되니까 굳어버린 거예요. 아끼다 똥 된 거죠. 그때 깨달았어요! 아끼지 말고 맘껏 쓰고 맘껏 비우리라. 물감에서 교훈을 얻은 겁니다. 물론 맘껏 쓰고 비우고 할 만큼 있는 것도 없지만요. 그러다 보니 아끼게 되더군요. 쓸 때가 없으니 아끼게 된다는 거죠. 말장난 같죠? 정을 줄 사람도 그나마 조금이라도 버는 돈도 쓸 때가 없는 곳이 이곳 섬입니다. 말씀처럼 저 태양같이 안 아끼고 싶은데 아끼게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미영이 장난하듯 짓궂게 깔깔거렸다. 영민도 재밌다는 듯 빙그레 웃는다.


"처음 섬에 들어 봤을 때는 도시의 그것과 다르게 한적해서 좋았고, 가진 것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어 불편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외롭기도 하고 뭍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집까지 고쳐줬는데, 뭔가 아낌없이 드리고 싶어도 드릴 게 없는 곳이 이곳입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뭘 바란다면 봉사가 아닌 것이죠. 그리고 활동하면서 주민에게 어떠한 보답도 불편함도 주고받으면 안 되는 게 봉사활동의 철칙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탐나는 게 있긴 합니다만...."


"그래요? 말씀해 보세요. 드릴게요!"


"이 그림 너무 좋군요. 제게 파시면 안 될까요?"


"팔긴요? 그냥 드릴게요! 집까지 고쳐줬는데 이깟 그림이야 약소할 뿐이죠."


"아닙니다. 좋은 작품이라 고맙기만 합니다. 그런데 마루에도 그림이 몇 점 걸려 있던데 화가신가요?"


" 화가는요. 그냥 취미로 그리는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전 미술 전공하는 분인가 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신 것 같아서."


"대학은 근처에도 못 가봤습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이렇게 틈만 나면 이젤을 펼친답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미대 진학해서 화가가 되어보시죠?"


"그럴까요? 지금이라도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림을 잘 모르긴 해도 저 그림 속 상괭이가 추상적이면서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다고 친구들도 감탄하던걸요."


미영은 영민의 말에 솔깃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미영의 얘기를 듣고 난 임여사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미영을 하늘이 보내준 선물이라며 두 손을 움켜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듬해 두 사람은 결혼했다. 미영의 첫사랑이었고 영민도 첫사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몸뚱어리는 보기에 멀쩡했지만 27년의 기억을 상실했고, 게다가 온전히 사람 구실을 할 날이 언제일지도 모르는 영민. 이러한 영민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미영에게 묻는다면 대뜸 어머니의 사랑을 들먹였을 것이다.

생연도의 추억을 들은 사람들은 이들의 인연이 하늘이 맺어준 것이라느니 두 사람의 운명이라느니 잔망을 떨었지만, 정작 미영은 영민 어머니의 자식 사랑에 감동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아원에서 자라는 동안 어머니의 정에 목말라 있었고, 학교에 엄마가 찾아오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몰래 울기도 했던 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장하는 동안 삶의 최고 가치는 가족 사랑이라는 인식이 의식 속에 자리 잡았고, 지극히 평범한 이러한 바람이 소원으로까지 여겨지게 됐다.


결혼을 하자 미영은 영민의 재활에 전념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 회복이 우선이기에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미영은 미완성품인, 아니 고장 난 영민이라는 사이보그를 정상 작동시키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다섯 해 전 봉사활동을 하던 중 영민이 미영에게 한 말,

"미대에 진학해서 화가가 되어보세요".

이 말은 섬과 미명 사이에 냉랭한 기류를 흐르게 했다. 결국 엄마의 자궁 속 같은 고향의 아늑함도 섬의 아름다움도 미영의 젊음을 붙잡지 못하고 섬을 떠나게 되었다.

세상이라는 탈을 쓴 늑대의 먹이가 되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찾아든 고향 섬은 엄마의 할머니의 동생의 향기가 집안 구석구석 배어 있었고, 심지어 바퀴벌레까지도 가족들의 내력을 알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퍼질러 앉아 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런데 먹이 사슬 상위의 눈동자들을 피해서 본래의 둥지로 날아든 미영이 과학 같은 편안함을 누린 것도 고작 1년

언저리였다.

영민이 지붕에서 떨어진 날 평상에 앉아 미영에게 물었던 말,

"이런 곳에 살면 외롭지 않으세요?"

그때 미영은 섬 생활이 행복하다고 했다. 상괭이 친구도 있고, 집 앞에 앉아 바라보는 노을을 한참 바라보기도 하며, 맑은 날 보이는 물마루는 환각에 빠진 것처럼 몽롱함을 주기에 수면제로도 딱이었다.

그랬다, 그땐 이렇게 대접하며 여유 있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땐 그랬다. 날마다 무서웠고 외로운 섬 생활이었다. 그런데 말하지 않았다. 자존심이기도 했고, 고향에 대한 모욕이기도 한 것 같았다. 가을밤 소소리 바람이라도 불어와 창문을 두드릴 때는 두려움에 잠 못 들었고, 봄비가 바다에 떨어지며 물방울의 군무를 보여줄 때는 모딜리아니 우수의 초상처럼 얼굴은 시루 줄어 울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겨울날 파르르 떨고 있는 문풍지 소리가 고성으로 들리는 밤이면 이불속에서도 한기가 몸을 와락 껴안아 그런 날은 해가 똥구멍에 뜰 때까지 숨기척도 없이 잠만 잤다.

실상은 이랬는데, 그때 영민의 물음에 가식적인 표정을 지으며 대학생인 영민보다 행복한 척했다.

가식적인 표정과 말들은 영민에게만 한 것이 아니었다. 소주를 사러 오는 낚시꾼이나 주전부리거리를 사러 오는 차박족을 비롯해, 그러해서 저러해서 섬에 온 여행객도 모두 영민처럼 물었고, 미영은 형민에게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미영을 부러워했다. 이처럼 미영의 섬 생활은 정육점 진열장 마블링 좋은 가짜 고기처럼, 혹은 시들지 않는 약품 처리를 한 꽃다발처럼 가식적이었다.

행복했던 게 어느 때부터 슬그머니 행복을 위장한 외롭고 무서운 섬 생활이 된 것이다. 문득문득 자신의 삶이 러닝머신 위를 뛰고 있는 형국이라는 생각이 의식을 지배했다.

그렇게 섬에 회의를 느낄 무렵, 도시 대학생인 영민의 말 한마디가 미영을 섬에서 떠나게 했다. 미영은 그날 저녁 영민의 말을 듣고 당장 떠나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계를 정리했다.

서울에 올라와 미대의 문턱을 넘지 못해 간호대에 들어갔고, 졸업 후 취업한 병원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처럼 영민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미영이었다.

그리고 인생 최고의 가치인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계획으로 영민의 정상화에 돌입한 것이다.


세 번째 둥지를 튼 생연도 대학 시절 등산 동아리 활동을 했던 미영은 영민의 재활을 돕는 데 생연도가 최적의 조건이라는 생각에 다시 섬에 스며들었다. 좋은 공기, 영민이 오르내리기에 적당한 섬산, 집 앞 아담한 해수욕장의 수영을 비롯해 이 모든 게 영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가게도 불을 밝혔다. 할머니의 낡은 선반 위에 얹힌 대병 소주며 포장지까지 변질된 몇몇 물건들은 여전히 미영의 새 상품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죽을 것 같아, 더 이상 못 가겠어."


"죽지 않아, 살려고 하는 거야. 살려면 이 정도는 견뎌야 해. 조금만 참아!"


섬산에 오르며 힘들어하는 영민을 미영이 매몰차게 다그 친다. 섬에 들어온 지 육 개월이 삽시에 지났다. 영민의 너절한 몸뚱이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두 사람이 염원이 얼마나 컸는지 알고도 남음이다. 어머니의 바통을 이어받은 미영이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사력을 다해 뛴 대가였다. 그때 영민의 손을 잡고 보건소로 달릴 때처럼 영민을 위한 경주를 늦추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도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가족이 뭔지도 모르고 엄마의 사랑이란 건 더더욱 몰랐기에 오롯한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영민이 쥔 바통을 뺏기 위한 노력이었다.


두 발로 어기적거리기도 하고 네빌로 기기도 하며 오는 섬산.

등산으로 다져진 체력에 비해 영민은 그야말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과 다름없는 고행이었다.


겨우 정상에 오른 영민이 동백나무 그늘 아래 널브러진다.


"섬산에서 보는 바다. 이런 풍경 처음이야. 미영 씨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 것 같아."


바다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더니 멈춰 휘돌아오고 돌아와서 옆으로 흐르며 바다가 뒤죽박죽이었다. 미영은 이것을 조류라고 했다.

길게 하얀 띠를 이루고 십 미터인지 백 미터인지 가늠할 수 없는 바다의 조류에 하얀 거품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러더니 바다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미영은 또 그랬다. 물돌이가 끝난 정조기라고.

정체되어 있는 바다만 보아온 영민에겐 생경한 모습이다.

오르니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래에 안주했더라면 이 바다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을 터인데 노력하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목적이 없었다면 오르지 않았을 것인데, 목적을 두니 움직이게 했고 움직이니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영민은 느낀다. 섬의 모든 게 어쩜 인생과 흡사한지, 섬산도 바다도 사람의 삶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집합소임을.

그때 미영이 소리쳤다.


"영민 씨, 저기 상괭이 가족이 나타났어!"


풀 몇 포기 단출한 조그만 여옆에 상괭이 가족이 사냥을 하는지 놀이를 하는지 한낮은 첨벙거리고 있다.


"영민 씨, 이곳에 올라와 보니 많은 게 보이지? 난 외로움을 느낄 땐 이 산에 올라왔어! 내려다 보이는 것에 나를 대비시켜 보는 거야. 그러면 내가 더욱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슴은 벅차고 뿌듯해지곤 했어. 고마워, 영민 씨. 나를 잘 따라주고 운동 열심히 해줘서. 처음엔 저기, 그다음엔 조기, 그리고 지금 여기.

봐! 어느새 정상이잖아! 시작하니까 끝에 오게 되잖아. 결국엔,


"당신 덕분이야. 어느새 산 정상도 오를 수 있는 건강을 찾게 해 줬으니, 당신 덕분이야. 고마워, 사랑해!"


바다에 석양이 물들기 시작했다. 미영이 빙긋이 웃으며 영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나 가족이 생겨서 너무 행복해. 어머니의 사랑을 받게 된 것도 행복하고, 나도 당신 덕분이야. 많이 사랑해!"


영민이 미영을 가만히 안고 입맞춤한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망초꽃도 두 사람을 축복해 주는지 살랑 거림이 앙증맞다.

그늘을 만들어 준 동백나무 꽃 한 송이 툭 계절을 떨군다. 떨어진 꽃을 주워 든 미영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다.


"영민 씨, 나도 동백처럼 가장 아름다울 때 도도하게 떠날 거야."


산을 내려오자 어둠은 금방 섬을 집어삼켰다.

까만 하늘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별들 가운데 하나,

어둠이 싫었을까 무리에서 이탈해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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