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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벌이 와이프도 퇴사하고 싶다.

기꺼이 당신의 발판이 될 수 있도록-

by 현아

어릴 때부터 난 생존력이 강했다. 첫 회사는 스타트업이었는데 입사한 지 2일 차에 아직 마케팅 용어도 다 익히지 못한 나는 대표님과 어떤 브랜드의 마케팅 연간 운영 플랜 발표를 하러 갔다.


그 제안서는 내가 작성한 게 아니고, 내 입사날 퇴사한 사수분이 작성했던 자료였다. 그 사수분은 이 회사에 한 달을 못 채우고 퇴사했다.



같은 해 나와 비슷한 연배의 또래들이 신입으로 이 회사에 입사했는데, 일 년 후 8명 중 나 혼자 남고 모두가 퇴사했다. 끈질기게 살아남아 스타트업에서 중견 기업으로, 중견 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차근차근,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어떤 직무에서 내 경쟁력을 살릴 것인지 고민했다.



성과 압박이나 과중한 업무를 떠맡게 되는 위기의 순간들은 늘 그렇듯 어찌어찌 버텨냈다. 그렇게 첫 직장 월급의 2배를 뛰어넘기까지 5년이 걸렸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미감이 남달랐다. 공부에는 딱히 흥미가 없었지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미대 졸업 후 조연출로 시작해서 입봉을 하면서 영상 PD로 진로를 전향했다.



자유로운 콘텐츠 회사에서 첫 발돋움을 시작해 원하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며 재미있게 살았다.



3년 정도 다닌 회사에서의 권태감을 느껴 내가 있던 스타트업으로 입사했고,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유명한 대기업 브랜드 영상팀에 이직을 성공했다.



여러 대기업과 작업한 포트폴리오 이력도 화려했고, 남편의 남다른 기획력이 신선하다는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삼 개월을 채 다니지 못하고 남편은 대기업을 퇴사했다.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동료 간의 상호 평가와 어떤 콘텐츠던지 데이터와 수치로 변환되어 평가하는 그 문화를 남편은 견디지 못했다.



대기업에서 중견 기업으로, 중견 기업에서 소규모 스타트업으로 남편은 이직에 이직을 거듭할 때마다 더 작은 규모의 회사로 이직했다.



불합리한 평가나 부조리한 직장 문화를 남편을 견디지 못했다. 부조리함은 더 작은 조직일수록 여파가 크기 때문에 남편이 이직을 거듭할수록 환경은 더 좋지 않아 졌다.



스트레스를 받아 위경련이 오기도 하고, 한 달이 안되어 살이 십 킬로 가까이 빠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퇴사를 권했다.



생존력 만렙인 내 눈에 남편은 나와 너무 달랐다. 내가 보기에 남편은 너무 상냥하고 마음이 여렸으며, 일은 잘했지만 사회생활 센스는 없었다. 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퇴사하고 다른 회사에 입사하기까지의 공백기는 때로는 일 년, 때로는 삼 개월이 되기도 했다. 그 공백기에도 우리는 열심히 살았다.



나는 우리 가족의 든든한 대들보가 되었다.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았고, 투룸 빌라 전세에서 청약에 당첨되어 아파트도 매매했다.



아이가 있고 매달 갚아야 할 대출금이 생겼으니 나는 하루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가 돌이 되기도 전에 복직을 했다.



복직을 앞두고 어느 날 나는 문득 이 불평등함에 대해 토로했다. 살림하는 것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왜 나는 다 해야 해?



내 인생의 모든 힘들고 행복한 순간 남편은 항상 내 곁을 지켰지만 나는 남편이 성에 차지 않았다.



첫 복직날, 추운 겨울이었고 눈이 내렸다. 해가 뜨기 전 꼭두새벽에 출근해서 퇴근을 했는데도 길이 미끄러워 집에 가는 발걸음이 느려졌다.



기존하던 업무들과 변경된 업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앞으로 육아와 일을 둘 다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거리들이 앞섰다.



멍하니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길을 걷고 있는데, 멀리서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검은 롱패딩을 목 끝까지 채운 남편이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면서 뛰어왔다.


깜깜한 저녁, 그 해의 첫눈을 함께 보자며 남편이 나를 마중 나온 것이다. 남편은 늘 그랬듯 따듯한 손으로 늘 차가운 내 손을 마주 잡고 본인의 패딩 주머니에 우리의 손을 넣어주었다.



걱정되는 마음, 속상한 마음,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따듯한 온기에 닿아 눈 녹듯 사라졌다. 내 마음의 불만도 함께.



남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집에 가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운이 좋아서, 잘나서, 능력이 있어서 직장생활을 버틴 것이 아니고, 내 남편이 내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아닐까.



내 불안정함이 남편의 세상을 침범하고, 남편의 안정감이 내게 물들어 나를 자리 잡게 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불평불만이 아닌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내가 선택한 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남편은 왕복 네 시간 출퇴근 거리를 오가는 나를 위해 밤마다 발을 주물러주고,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으면 따듯한 차를 타주고, 내가 걱정하지 않도록 아이 하원과 케어를 도맡아 하며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지지하고 안정감을 선사해 주었다.



주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마다, 남편은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나를 믿고 따라주었다. 내가 잘 된 길마다 되돌아보면 남편의 서포트가 있었다.



그 덕에 복직 후 나는 빠르게 회사에 적응했고, 더 나은 조건의 회사로 이직을 하기 위해 조직이동 의사를 밝히고 팀을 옮겼다.




재직 중 마침 좋은 타이밍에 내가 원하던 조건의 회사에 입사도 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기꺼이 발판이 되어준 내 남편을 위해 나도 그의 발판이 되어주고 싶다.



남편은 지금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회사가 아닌 스스로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자영업은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투르고 매출도 지지부진하다.



나도 틈틈이 돕고 있지만 사실 망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애초에 실패를 염두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실패해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만나기 전에 삶이 평온했다던 남편은, 나와 결혼하고 인생이 다이내믹하다며 하루하루가 새롭다고 한다.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어서 즐겁다고도 한다.



직장 생활이 맞지 않다면, 그 점쟁이 선생님 말씀처럼 직장운이 없다면 꼭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 모든 사람이 직장에 다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으면 된다. 평생 한 직업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20살에 제 길을 찾지만, 누군가는 쉰이 다 되어서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다. 나는 그 때를 기다리고 있다.



만약 남편이 더 큰 성장을 원한다면, 그리고 그 성장에 내 도움이 꼭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나는 기꺼이 퇴사하고 싶다. 이번엔 내가 남편보다 낮은 자리에서 기꺼이 그 발판이 될 것이다.



물론 그전에 경제적인 안정을 더 이뤄놓기 위해 오늘도 퇴근 후 나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 시간은 자산이다. 다음 장에서는, 외벌이 와이프가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소비전략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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