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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아 Oct 11. 2021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방청소를 하면서 옛날 일기장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기였는데 힘들다는 얘기가 거의 4달간 이어져 있었다. 지금 기억에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초반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우리 반에는 같은 중학교에서 온 친한 친구가 없었다. 나랑 친했던 친구들은 8반에 있었다. 그래서 학기 초에 쉬는 시간마다 8반에 가서 중학교 때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학기 초반에만 그랬지 나중에는 우리 반 친구들과 잘 지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학창 시절 중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 고1 때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거의 한 학기 내내 힘들다고 일기를 썼다니 놀랐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스스로 내가 왕따라고 일기에 쓰여있었다.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활발해서 다 같이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그런지 적응 못하는 나 혼자만 왕따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 자신을 왕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에 없어서 너무 놀라웠다. 하물며 아무도 나를 왕따 시킨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내용도 많았다. 그렇게까지 내가 힘들어했다니. 


 정말 적응을 못 했다고 느낀 것이 수학여행을 가게 됐을 때였다. 내가 적응을 잘 못하고 있는 것을 걱정한 중학교 때 베프는 수학여행에 가서 자기와 같은 방에서 같이 잘 수는 없는지 선생님께 알아보자는 말을 했었다. 얼마나 내가 힘들다고 했길래 다른 반 방에서 잘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했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의 시간들이 다 소중하고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반 친구들과 가장 많이 연락하고 지낸다. 일기를 보면서 느꼈다. 지나고 나면 상처는 무뎌지고 좋은 기억만 남는구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나온 사연 중에 어떤 사람을 실수로 죽였다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법륜스님은 아무리 힘들어한다고 해서 돌아가신 분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물어보셨다. 사연자분은 그렇다고 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일이 있던 직후보다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어떠냐고 처음보다는 괜찮아지지 않았냐고 하셨다. 사연자분은 또 그렇다고 말했다. 스님은 몇 년이 지나고 몇십 년이 지나면 더 괜찮아지지 않겠냐고, 어차피 괜찮아질 것이라면 지금부터 괜찮으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사연자 분은 맞다고 말씀하시면서 스님께 감사하다고 말씀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 괜찮아질 일이라면 지금부터 괜찮아지면 좋을 것이다. 지나고 나면 정말 아무렇지 않을 일들도 많다. 물론 힘들 때는 충분히 힘들어해야 나중에 완전히 홀가분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충분히 힘들어하고 난 후에는 괜찮아지기 위해 상황을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먼 훗날에는 내가 괜찮아지겠구나. 이 또한 지나가겠구나. 그러면 지금을 좀 더 괜찮게 생각해볼 여지도 생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시련으로 느껴지는 비극적인 일들도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 될 수 있다. 좀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면 내가 느끼는 비극의 강도를 약간은 낮출 수 있지 않을까?   

  

 너무 힘든데 억지로 참으라거나, 힘을 내라는 말이 아니다. 가장 힘든 당시에는 충분히 감정을 표현해줘야 속이 후련해진다. 펑펑 울고 나면 오히려 평온해지는 것처럼. 그러다 좀 덜 힘들고 싶어지는 때가 오면, 상황을 멀리서 바라보는 연습을 하자. 이 또한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가면 희극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일은 지나가기 마련이며, 그렇다면 모든 것이 희극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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