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의 감사

by 현카피

할머니는 생전에 유독 나를 이뻐하셨다. 자식들 중 혼자만 형편이 안좋은 둘째 아들의 핏줄, 날 때부터 불편한 몸으로 태어난 가련한 아이여서였을까.


나는 명절 차례상에서 늘 음복으로 할머니 앞에 놓인 술을 마신다. 미신이라고 해도 좋다. 수십년째 다른 사람이 무심코 먼저 마실까봐 제사가 끝나기 무섭게 상으로 가 할머니의 잔을 집어 든다. 술을 입 안에 담으며 마음속으로 늘 인사를 드린다.


살며 가장 힘들었던 올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아침에 샤워를 하다가 문득 할머니를 떠올렸다. 수전에서 쏟아지는 물을 그대로 머리와 몸으로 맞으며 서서 할머니께 감사드렸다. 할머니, 저 일 계속 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제 많은 병들 더 나빠지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지현이 병 재발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다연이 삐뚤어지지 않고 자라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폐암 더 나빠지지 않게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니 수술받지 않고 눈 더 나빠지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우환 닥칠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선배 좋은 후배 몇 사람 곁에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공황장애인데도 사고 나지 않고 운전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조금은 너그러운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할머니가 들으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감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아니, 부탁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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