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분, 책 읽는 거 좋아하세요?
좋아하시면 다음 진료 때까지 책 한 권 읽어와 주세요. 숙제입니다.
교수님이 숙제를 내주셨다. 책 읽는 걸 좋아하냐니, 물론이다. 더군다나 누군가 내주는 숙제를, 나라는 사람은 참 열심히도 한다. 책 읽는 숙제는 무조건 할 수밖에 없다. 그럼요, 교수님. 누구보다 잘할 자신 있죠.
추천해 주신 책은 <우울증을 부탁해>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송후림 교수가 쓴 책이었는데 아쉽게도 절판되어 있었다. 포기할 수야 없었다. 중고책을 찾아 헤매다 겨우 한 권을 구했다. 왜 절판이 되었는지 아쉬울 정도로 좋은 책이었다. 우울감이 커진 후에는 오랜 시간 집중해 독서하기가 힘들었는데, 이 책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우울증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우울증을 이해하기 위한 물음과 우울증의 여러 가지 모습, 우울증을 밝혀내기 위한 물음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물음이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우울증 환자와 그 가족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물음이다.
결국에는 좋은 정신과 의사를 주치의로 삼고 일대일로 상담을 받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이 책을 통해 제가 가장 하고 싶은 말도 '여러분의 주치의를 믿고 충분히 상의하라'는 것입니다. - 송후림, <우울증을 부탁해> 중에서
우울증일 때 가장 취약해지는 게 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막연하게 우울증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제대로 알고, 치료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면 불안함이 줄어든다. 이때, 제대로 알아야 할 순간 나를 도와주는 것은 좋은 책 한 권과 주치의가 아닐까. 우울증이 시작되면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배처럼 외롭다. 이럴 때 길잡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우울증은 외부 스트레스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표적인 것이 살아가면서 겪는 갖가지 실패와 갈등, 가까운 사람과 이별 혹은 사별, 주변 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 상실감을 주는 사건입니다. 대인 관계 갈등이나 경제적 문제 같은 스트레스도 중요한 원인입니다. - 송후림, <우울증을 부탁해> 중에서
개개인에게 '상실감을 주는 사건'은 각각 다르게 생길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직장에서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상실감을 느껴온 경우'에 해당된다. 단순히 실패는 곧 상실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희망고문, 기대감, 반복되는 실패로 상실감의 구성 요소를 채웠을 테니 말이다.
흔히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부릅니다.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감기만큼 흔한 병인 동시에, 잘 관리하거나 일찍 치료받으면 큰 어려움 없이 나을 수도 있는 병입니다. 그러나 감기를 방치했다가 폐렴이 될 수 있듯이 우울증도 내버려 두면 약물 남용, 알코올중독, 자살 등과 같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 송후림, <우울증을 부탁해> 중에서
우울증이 시작되고 나서 나를 괴롭혔던 생각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라는 왜곡된 사고였다. 이는 무한 확대되고 재생산된다. 나는 쓸모가 없고, 사랑받을 가치가 없고,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나를 마음의 감옥에 가둔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우울증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울증을 앓고 나서 한층 성숙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울증이 생긴 원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울증이 주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힘들고 괴로워도 결국에는 바닥을 치고 올라설 것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 송후림, <우울증을 부탁해> 중에서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떤 일이든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놓인다. 이걸 잊으니 문제다. 우울증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인데, 처음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우울증에 걸리나 싶은 것이다. 왠지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고, 제대로 못살아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럴 수도 있다. 나는 완벽하지 않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우울증에 걸린 게 성숙해질 기회가 주어진 거라 믿고 싶어졌다. 지금 내 인생이 한겨울 얼음바닥 아래 있는 것 같지만, 이 겨울이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주치의가 내준 독서 숙제에 큰 위로를 받았다. 우울증에 대해 질문이 생긴다면 <우울증을 부탁해>의 질문과 답을 주목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