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회사가 나빴네요. 그동안 너무 힘드셨겠어요.
환자분 탓이 아니에요. 이제 자책하지 말아요.
우울증이 시작되고 나서 가장 자주 한 일은 '자책'이었다. 끝없이 나를 탓했다. 모든 잘못의 원인은 내게 있는 것만 같았다. 천성이 약아빠지지 못한 터라 묵묵히 일만 한 것도 내 탓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자책의 고리를 끊어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 의지로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내 탓이오'를 멈추는 일이었다.
동네 병원에 가서 초진을 볼 때, 나름 간략하게 할 말을 정리했다. 증상과 짐작되는 원인, 지금의 마음상태까지 최대한 일목요연하게 말하고 싶어서 미리 글로 써뒀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진료실에 들어간 순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논리적으로 정리된 말은 금방 휘발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눈빛에 그저 무너져 내렸으니 말이다.
눈물을 흘리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회사에서 일어난 일, 지금의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를 털어놨다. 그랬더니 대뜸 의사의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회사가 나빴다니, 자책하지 말라니. 그게 아닌데, 내가 다 잘못한 일인데 그렇게 말해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멈출 수 있었다. 아, 내 탓도 있겠지만 전부 내 탓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환자분 글씨만 봐도 알겠습니다. 성실하고 완벽주의 성향인 분이군요.
그런데 이런 분이 우울증에 잘 걸립니다.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성향이 있단다. 이런 말도 처음 들었다. 진료 전 기본적으로 받아야 할 검사지에 손글씨로 답을 썼는데, 글씨에 내 성향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지만 성실한 것 하나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뭐든 잘하려고 하고, 남에게 폐 안 끼치려 노력하고, 최대한 내 감정을 절제하며 사는 게 최고라 믿었다. 직장에서 책임감 있게 업무를 수행하는, 그런 일개미였던 내게 '우울증에 잘 걸리는 성향'이라는 진단이 오히려 고마웠다. 정말 내가 크게 잘못한 게 아닐 수 있으니까.
남 탓만 하는 것도 문제다. 그런데 내 탓만 하는 것도 큰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돌보고, 내가 내 편이 돼줘야 하는 게 옳다. 상처받고,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사회적 시선만 생각해 온 내가 한심스러웠다. 잘할 때도 있고, 잘하지 못할 때도 있다. 완벽할 때도 있지만, 완벽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우울증이라는 건, 특별한 이들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이제 조금씩 마음이 편해진다. 조금 덜 성실하고, 덜 완벽해도 괜찮다. 나는 그저, 오늘을 성심껏 살아가려는 사람일 뿐이다.
혹시라도 나처럼 아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분이라면 조심하자.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하다.
- 주위에 민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 눈치를 많이 보고, 사회적 평가에 민감하다.
-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고, 절제하는 것만이 옳다고 믿는다.
-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다.
- 거절을 잘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워한다.
- 늘 나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한다.
- 차라리 내가 손해 보는 게 마음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