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전문직의 일반직 '전환'에
지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환평가 결과, 다음 전형인 임원면접의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11월의 마지막날, 2년에 한 번 꾸역꾸역 치르는 시험에 또 낙방했다. 인사팀에서 보내온 메일의 문장을 수백 번 다시 읽었다. 건조하지만 예의 바른 문구에서는 어떤 희망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매번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해 속상하고 절망적이었다. 이번만큼은 서류전형은 꼭 통과하리라 마음먹었는데, 역시 욕심을 부리고 집착한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일까. 나는 또 패배자였다.
19년째 다니고 있는, 지금의 회사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계급이라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현실이 그렇다. 파견직, 계약직, 전문계약직, 연봉직, 전문직, 일반직... 계약직, 전문직이 일반직과 같은 일을 하고 다른 급여를 받는다. 내가 받는 급여는 일반직의 68% 정도 수준이다. 과거에는 더 많은 차별이 있었지만, 아주 천천히 개선되고 있다. 계급제라고 하니 마치 신라의 6두품 제도가 떠오른다. 성골, 진골, 6두품...
나는 전문직이다. 정년은 보장되지만 일반직과는 다른 급여를 받고, 차별을 받는 무기계약직이라고 할 수 있다. 19년 전, 회사에 전문계약직으로 입사했고 지금은 전문직인데 최근까지 전문직은 '업무직'으로 불렸다. 마치 일반직을 보조하는 업무지원직과 비슷한 느낌의 직군이었다. 업무직은 뭐고, 전문직은 또 뭔가. 복잡하게 경계를 그어놓는 쪽을 선택하는 게 회사 입장에서 더 편했을까.
이번엔 OO부서의 A 씨가 유력하던데 마음을 접는 게 좋겠다!
회사에 돌고 도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포기가 안되던 나였다. 사실 매번 전환 대상자에 오르내리던 유력 후보가 있었다. 이 말을 듣고도 포기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받아 든 탈락 고지 메일에 나는 무너졌다. 처음엔 화가 났고, 그다음엔 무력해졌다. 이 모든 감정이 온몸으로 덮쳐왔고 그때부터 우울증이 시작된 게 아닐까.
우울증은 갑자기, 사건 하나로 시작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지난 19년 간 가슴에 울화가 쌓였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시선, 타인의 평가, 언제나 인정받아야 살아남을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까지. 한 마디로 설명이 다 안될 만큼 긴 시간 속에서 나는 말라죽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일만 잘 해내면 잘 될 거야!, 이번에만 고생하면 전환될지도 모르니 최선을 다해봐.." 이런 희망고문에 속고 또 속으면서 얼마나 긴 시간을 괴로워했던가.
우울증은 멈추지 않는 눈물에서 시작됐다. 울고 또 울어도 계속 나오는 눈물에 당황스러웠다. 그다음은 불면증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들기가 힘들다. 눈만 감으면 미친 듯이 자책하고 과거로 돌아가 내가 했던 모든 선택을 후회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잠을 못 자면 몸이 지친다. 정신이 맑을 수가 없다.
그다음 단계는 모든 욕구가 사라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먹고 싶은 게 사라지고,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도 사라진다. 먹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내내 굶을 수도 있겠다 싶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피하게 된다. '대인기피'의 일종이다. 혼자 있고 싶고, 누군가 말을 거는 것도 싫어진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게 불가능해진다.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다 결국 집 근처 병원에 갔다. 수면제라도 처방받아볼까 해서 갔더니 우울증, 불안장애인 것 같단다. 온갖 검사를 다 받고 '중증 우울증'이니 한 두 달 치료를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냥 우울증도 아니고 중증이라니. 내가 그렇게 심각한 지경에 되었는 지도 몰랐을 만큼 열심히 일한 것 밖에 없는 삶이어서 억울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몰랐다.
현재 우울증 치료 둘째에 접어들었다. 연말연시에 걸쳐 보름간 휴가를 내고 회사일을 쉬었다. 지난주부터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고 1~2주에 한번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고, 나름의 과제를 부여받아 온다.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치료 중이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충분히 쉬면서 산책을 하고, 우울증 치료에 도움 되는 책도 읽는다. 가족과 함께 더 많이 웃으려고 노력한다. 매일 잊지 않고 약을 챙겨 먹고, 조금이라도 더 잘 자려고 한다. 생활이 단순해지니 생각도 가벼워진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분명, 나는 좋아지고 있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알려주고 싶다. 이제 '내 탓'은 그만하라고. 다른 사람만 아껴줄 게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봐주라고. 그리고 분명 치료법이 있고, 잔뜩 꼬인 매듭을 풀 방법이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