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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를 축하해요

남은 자와 떠난 자의 안부인사

by 글쓰는 워킹맘
떠나간 이들의 흔적 보듬기
© eberhardgross, 출처 Unsplash


어수선했던 연말, 많은 이들이 회사를 떠났다. 그 중엔 오랫동안 함께 일했어도, 인사 한 마디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진 이들도 있고,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마음이 너무나 잘 맞았던 이들도 있다. 내가 모셨던 상사 중 인생 롤모델이신 분도 떠나셨다. 남은 자와 떠난 자,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떠나갔다.


헛헛한 마음 한 편으로는 그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더 컸다. 과감히 떠난 그 용기가 부러워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기회 앞에서 준비되지 않은 자는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우리가 주고받은 건, 문자가 아닌 마음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을 키우며 가끔 육아 이야기를 나누던 분께 메시지를 받았다.


함께 일했던 그 때를 기억하세요?
문득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두 아들과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보기와는 다르게 마음이 여린 나는 울고 말았다.

참 좋은 사람들이 그렇게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녀에게 바로 답장을 했다.


OO님의 아름다운 새 출발! 축하해요!
앞으로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릴 겁니다. 제가 장담해요.
회사 밖에서 편하게 또 만나요. 그리고 가르침 주세요.
홀로서기하며 쌓으신 지혜를 조금만 나눠주세요.


회사를 나가면 하고 싶은 일들


또다른 한 사람, 나와 동갑내기인 그녀는 회사를 떠나면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차례로 하고 싶다 했다. 어떤 일들이냐 물었더니 얼굴 가득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답한다. "베이킹(baking)을 배울 거예요." 빵을 만드는 일은 그녀의 전공, 회사에서 담당했던 일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 말에 나도 활짝 웃어주었다. 그녀는 지금, 빵을 만들고 있을까? 그 빵은 얼마나 맛이 좋을까.


나도 회사원이 아니라면 하고픈 일을 적어본다. 떠난 자들이 내게 남겨준 선물이다. 회사의 그늘이 아니라면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척척 답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몇 가지 적다보면 금방 바닥이 나버린다. 역시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이다. 진짜 나의 모습, 내가 원하는 삶, 나의 꿈에 관한 깊이 있는 질문들 말이다.

© kentreloar, 출처 Unsplash


지금의 나, 어디에 있는가


해가 바뀌고, 나는 똑같은 자리에서 같은 업무를 한다. 올해는 같은 일이라도 더 새롭게, 더 창의적으로 해보겠다 마음 먹었는데, 새해 첫 출근날 시작된 아이디어 회의에서 마음까지 쪼그라들었다.


좀 더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낼 수 없나요?


상사의 한 마디에 온 몸이 얼어붙었다. 여전히 나의 마음그릇은 깨질 듯 약한가보다. 예전보단 분명 나아졌는데, 왜 자신감은 점점 떨어지는 것일까. 겨울철 과다한 사무실 난방에 몸만 메말라간 게 아닌 걸까. 아이디어는 어디에 있을까. 머리를 쥐어짜고, 또 쥐어짜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마흔이 되었지만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갑자기 '창의적인 인재'가 되지도 않았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나는 나인데,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을지도 모른다. 자꾸만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하는 내가 문득 안쓰럽다.


사막처럼 말라붙은 마음을 들여다보다, 떠난 이들을 생각한다. 조금은 떨리고, 더 크게는 설레는 마음으로 회사 문 밖을 나선 이들이 내게 건네고 간 건 '잘 있으라'는 안부 인사나 덕담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말 한 마디가 내게 커다란 파장을 남기고 말았다. 이제 남은 자의 대표인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그들이 주고 간 질문들에 답하는 삶을, 올 한해 살아가겠다. 이 마음을 잊지 말고, 마흔 살의 첫 한 달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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