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18년 동안 해온 나도 대단하다. 솔직히 남에게 당당하지 못했었다. 같은 일을 18년 했다면 남들이 보기에 천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천성은 그 일에 타고난 사람을 말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들이 보는 눈은 중요하지 않았지만, 보는 눈 때문에 직업을 못 바꾼 것도 한편으로 사실이다. 물론 다른 직업을 선택하고 뛰어들 용기가 없었던 게 더 정확하다. 적성에 맞지 않으면서도 남들의 시선과 월급에 발목 잡혀 살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없었다.
게임을 개발하면 정식 오픈 전 베타 테스트 기간을 거친다. 이때 테스트 유저의 호불호를 파악하고 기계적 오류를 점검해 수정 보완한다. 어떤 게임은 개발 기간보다 베타 테스트 기간이 더 걸리기도 한다. 중요한 건 보다 완벽한 게임을 세상에 내놓기 위한 과정이고, 이는 결국 기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게임 개발과 직업 선택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평생 직업의 개념이 점차 희미해지는 요즘이다.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는 게 능력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물만 주면 며칠 만에 쑥쑥 자라는 콩나물처럼 직업을 쉽게 갈아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그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지부터 확인해 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 앞서 스스로에게 베타 테스트 기간을 주는 것이다.
나도 7년째 베타 테스트 중이다. 마흔셋 까지 한 가지 일만 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서인지 아홉 번이나 이직했다. 그때쯤 많이 지쳤던 것 같다. 새로운 걸 해 볼 의욕이 사라졌다. 자리만 지키자는 심정이었다. 한편으로 들어차는 나이 때문에 자리를 언제까지 지킬 지 불안했다. 사람은 그냥 죽으라는 법이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우연한 기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안에 목소리에 이끌렸던 것 같다. 글을 써본 적도 없던 내가 글을 쓰겠다고 한 건 둘 중 하나다.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당시에는 확신이 없었지만, 정해진 운명 같은 게 작용했거나. 시간이 지나면 운명인지 아닌 지 알게 될 테니 그건 그때 가서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당장은 글을 쓰는 게 좋았고 살아갈 의욕이 생겼다. 무언가에 꽂힌 것도 오랜만이었고, 내 안에 욕심이 있다는 낯섦이 주는 흥분 같은 게 생겼다. 원래 나는 잘 꽂히지도, 욕심은 더더욱 없는 사람이었다.
7년 전 글을 쓰기 시작할 때도 반신반의했다. 언제까지 글을 쓸지, 얼마나 잘 쓸지, 글로 먹고사는 게 가능할지, 어느 것도 분명한 게 없었다. 막연했지만 해보고 싶다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잘만 하면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은 갖고 있었다. 잘 만 한다면 말이다. 그러니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우연한 기회이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앞서 고민은 깊었다. 적성에 맞을지, 끈기 있게 할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을지 등등. 섣부른 판단으로 결정할 게 아니었기에 더 오래 고민했다. 고민 끝에 베타 테스트 기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기한을 정하지 않은 테스트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퇴직을 감행한다면 그때가 테스트 종료인 것이다. 안타깝지만 여전히 직장에 다니며 성실히 테스트에 임하는 중이다.
다행히 지난 7년 동안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10여 권 책을 썼고 책 쓰기 정규 강의를 론칭해 가르치는 사람이 됐고, 그 사이 몇 곳에서 강연도 했다. 수입이 월급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는 건 그 이상의 성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에 미리부터 직장을 그만뒀다면 지금과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 같다. 최악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객기로 뛰쳐나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그런 불쌍한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7년을 버틴 덕분에 그런 불상사는 피했다. 만약에 조만간 퇴직을 하게 된다면 적어도 다시 돌아가는 일을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잘 준비해 왔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수년간 개발에 매진하고, 수십 개월 베타테스트를 거친 게임도 어쩌다 유저의 외면을 받을 수도 있다. 누구나 성공을 바라지만 누구에게나 성공은 허락되지 않는다. 직업을 바꾸는 것도 다르지 않다. 수백, 수천 일 준비해도 운이 안 맞고 막상 맞닥뜨린 현실이 생각과 많이 달라 헛발질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 어쩌면 나도 호기롭게 직장을 뛰쳐나갔다가 어떤 현실을 마주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최악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좋은 기회가 오기만 앉아서 기다릴 수도 없다. 바벨을 움켜쥐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손바닥에 굳은살이 배기고 근육도 붙는 법이다. 닥쳐서 준비하는 사람과 일찍부터 준비하는 사람 중 잔근육이 더 많은 게 어느 쪽일지는 누구나 알 것이다.
퇴직은 또 하나의 출발선에 나란히 서는 것이다. 누구는 일찍부터 몸을 풀어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드는 가 하면, 누구는 몸이 굳은 체로 출발 동작을 취한다. 퇴직 이후는 1등을 차지하기 위한 경주가 아니다. 누가 더 행복하게 오래 달릴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잘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직장에 다니는 지금이 원하는 일을 해볼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베타테스트에 진심일수록 세상에 없는 게임을 론칭할 수 있듯,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직장에 다니는 동안 진심을 다해 베타테스트에 임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