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니 30분 지났다. 빈 화면에는 여전히 커서만 깜빡였다. 뭐라도 쓰기 시작하면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오르는 게 너무 많았다. 수많은 생각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 몰랐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마음에 드는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기대보다 두려운 감정이 더 커졌다. 괜한 객기를 부린 게 아닌가 싶었다. 객기가 맞다. 어설피 시작하니 어설픈 글도 못 쓰고 있었다.
호기심이 어느 순간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그 자신감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소설에 손도 안 대던 내가 우연히 그녀의 글을 읽었다. 몇 겹을 껴입었어도 한겨울 찬바람이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몸이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채로 계속 읽어 나갔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땐 내 안에서 온기가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난생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아마도 엄마 배속에 머물 때를 기억한다면 그때와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손을 놀릴 수 없었다. 차분히 그리고 빠르게 그녀의 글들을 읽어 나갔다.
6개월 째다. 그녀가 만들어낸 모든 글을 읽었다. 한 번만 읽지 않았다. 읽고 또 읽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글은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더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해한다는 게 만용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글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녹아들어야 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문신처럼 가슴에 머리에 새겨야 했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가슴에 머리에 새긴 것들을 때때로 눈길 주다 보면 어느새 그것들과 하나가 되어있을 거라 믿었다. 몸에 새긴 문신이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듯 그녀의 문장도 점점 선명해졌다. 아마도 그때부터 자신감도 머리를 쳐들었던 것 같다.
비슷한 경험을 몇 해 전에도 했었다. 그때는 멋모르고 덤벼들었다. 고작 책 몇 권 읽었다고 책을 쓰겠다고 말이다. 무참히 짓밟혔다. 오만의 대가로 수천 만원을 날렸다. 날려버린 돈보다 섣부른 나를 탓했다. 손톱밑 때보다 못한 자신감만 믿고 덤벼든 내가 한심했다. 그러고 나서 꼬박 4년을 글공부에 매달렸다. 독학으로 말이다. 그 사이 엉덩이는 짓물렀고 주변 사람은 자취를 감췄고 쓰다만 원고만 쌓였다. 매달리면 나아질 줄 알았다. 시간이 더해질수록 자신감은 떨어졌다. 언제 멈춰야 할지 눈치만 봐왔다. 차마 내려놓지 못했고 끊어지지 않을 만큼 부여잡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줄 알았다. 몇 해전 어설피 시작했던 것과는 시작이 달랐다. 아니 달라야 했다. 고작 4년, 반 실성한 사람처럼 글만 쓰고 살았다. 쓰면 쓸수록 자신감은 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글 덕분에 또 한 번 용기 낼 각오도 생겼다. 각오는 각오일 때가 가장 빛난다. 막상 시작하고 나면 빛났던 각오는 한없이 초라해진다. 차라리 시작하지 않았을 때가 그나마 생기가 돌았던 것 같다. 또다시 내 수준을 마주하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객기로 남보기 그럴듯한 흉내만 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