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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면

by 김형준

책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8년 전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계발 분야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처음 읽었습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상대로 자행한 포로수용소의 실상을 낱낱이 밝힌 내용입니다. 그 안에서 빅터 프랭클은 가족을 잃었지만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잃지 않았기에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 안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로고세러피’라는 심리치료 분야로 발전시켰습니다. 8년 전 읽었을 때는 그가 남긴 말 중에 꽂히는 문장 위주로 찾았습니다. 누가 읽어도 밑줄 긋는 그런 문장들이었죠. 그때 저는 어쩌면 숲이 아닌 나무에만 눈이 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8년 동안 1천 권 이상 읽는 동안 생각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기 계발 및 심리학 분야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다루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같은 책을 놓고 서로 다른 영역에서 해석하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자기 계발에서는 목적이 분명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면, 심리학에서는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같은 책을 놓고도 해석이 달라지는 건 읽는 사람이 어떤 가치관과 배경 지식, 경험 등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저처럼 독서 경험이 적을 때 받아들이는 내용과 독서량이 쌓이고 나서 책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지는 것처럼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꿔 말해 내가 이 책을 읽고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책에 가치가 달라진다는 의미이죠. 그 전제에는 지금 내가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생각하는 수준과 판단력이 달라질 수 있죠. 중요한 건 이런 가치판단이 시간이 더해짐에 따라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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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그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도 그 시기를 살아봤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을 때는 의미를 부여하는 게 한정될 수 있습니다. 과거도 마찬가지겠지요. 다 읽고 나서 시간과 경험이 더해질 때 비로소 더 많은 의미를 남깁니다. 과거 속 나는 그때가 어떤 의미일지 짐작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연륜이 붙은 후에야 과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죠. 달리 말해 의미는 시간이 지나고 경험해보고 나서야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점이냐 어떤 생각과 기준을 가졌느냐에 따라 가치 판단이 달라지는 거죠. 30대가 되면 20대에 나에게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습니다. 50대가 되면 40대 삶이 어땠는지 가치를 따져볼 수 있는 거죠.


50인 지금 30대를 돌아보면 불확실의 연속이었습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분명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매일매일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부딪치고 넘어지고 깨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 시기였습니다. 건강하다고 몸을 혹사시켰고, 시간이 많은 줄 알고 낭비했고,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다고 막연히 긍정했습니다. 한편으로 이렇게 질풍노도 시기를 지나며 멈추지 않았기에 지금 50에 닿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경험을 양분 삼아 말이죠. 30대 때 실수와 실패를 반복한 경험은 무거운 덤벨을 들고나면 손바닥에 생기는 굳은살 같은 거였습니다. 굳은살이 더 큰 중량을 들 수 있게 도와주니 말입니다. 40대 또한 저를 단련해 온 시간이었습니다. 30대 때와 또 다른 시기였죠. 책임은 많아졌고, 불확실은 더 커졌고, 몸은 점점 약해졌고, 설 자리는 점차 좁아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30대 때 경험 덕분이었죠. 앞으로 맞을 50대 삶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불확실은 따라올 것이며 되는 일보다 되지 않는 일이 많을 것이며 몸은 더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40대 때를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그때 경험이 몸 이곳저곳 근육이 되어 중심을 잃지 않게 잡아주고 있죠. 만약 3040 때 저를 부정하면 어떨까요? 과거를 부정하고 현재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현재 나는 과거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말처럼 지금 나는 그 경험들의 총합입니다. 내가 나의 과거에 가치를 인정해 줄수록 현재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치열하게 살수록 쉽게 지친다고 말합니다. 지칠 때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어떤 의미일까?’라고요. 아마 그 순간 답하지 못할 겁니다. 숲에 있으면 나무만 보이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 시기를 이겨내고 시간이 지난 어느 시점에는 그때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이겨냈든 이겨내지 못했든 그에 맞는 의미를 남겼을 테니까요. 그 경험들이 이어져 결국 지금 자신을 만들었습니다. 그제야 지난 시간 속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정말 중요한 건 훗날 이 순간이 의미를 가지려면 지금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요. 인생은 과거-현재-미래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만족해하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시작은 지금입니다. 오늘을 잘 살아 내면 의미 있는 과거로 남습니다. 오늘 잘 살아 내면 미래가 기대됩니다. 당장 내 삶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면 우선 지금에 집중해 보는 겁니다. 숲을 벗어나야 숲이 눈에 들어옵니다. 숲에서 벗어나려면 한 발씩 내디뎌야 합니다. 내딛는 발에만 집중할 때 길을 잃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일에서 삶에서 의미를 잃었거나 찾는 중인가요? 제일 먼저 과거 나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따라 현재도 달리 보일 겁니다. 다시 미래의 나를 떠올려 보세요. 미래 나는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요? 과거와 미래의 나를 만드는 시작은 현재의 나입니다. 결국, 지금만 잘 살아 내면 과거도 미래에도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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