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종이에 켜켜이 쌓여있는 타인의 삶

#11. 쓸수록 쓸모 있는 단어

by 김형준

책:

종이에 켜켜이 쌓여있는 타인의 삶을 만나는 기회


#1. 버스 안


등교를 위해 한 시간 가량 버스를 타야 했다. 출근길 혼잡을 피하고 싶어 이른 새벽 집을 나섰다. 늘 같은 시간 도착하는 버스의 빈자리 중 맨 뒷 줄 창가 자리를 차지했다. 전날 읽었던 '한명회'를 꺼내 들었다. 며 칠째 읽고 있었다. 하굣길 버스 안은 빈자리가 없었다. 아침 시간만 읽다 보니 더디게 읽혔다. 5권 짜리였고 두 어달을 꾸역꾸역 읽었다. 책은 1년에 한 번씩 읽는 연례행사 같았다. 몇 달을 쉬다 기분이 동할 때 또다시 꺼내 들었다. 기분 내킬 때 찾는 책이라 의미보다 재미로 읽었다. 또 멍하니 앉아 있기보다 책이라도 읽는 모습이 좀 더 있어 보였다.


#2. 자기 계발

건설업은 사람을 많이 상대한다. 한 현장엔 다양한 직종의 근로자를 필요로 한다. 짧게는 몇 개월, 길면 3년 이상 이어지는 곳도 있다. 그 기간 동안 거쳐가는 이들만 수 백, 수 천명이다. 현장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사람, 전문 기술자, 기술자를 돕는 보조 기술자, 특정 직종은 팀을 꾸려 다니기도 한다. 이들을 일일이 상대하진 않는다. 이들을 관리하는 이들과 현장일을 진행한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서로 의견이 다른 경우, 공사 비용과 기간 문제 등 다양하다. 어느 일이나 사람과 부딪힘이 없을 수 없다. 일은 일이고 인간관계는 인간관계다. 하지만 나처럼 부딪힘이 견디기 힘든 이도 있다. 의견만 주고받는 수준을 넘는 경우가 많다. 감정이 격해져 고성이 오가기도 하고, 심하면 몸의 대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십수 년 일을 해왔지만 나와는 정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시로 이직을 준비했었다. 현장을 벗어나 사람고 덜 부딪히는 직장을 원했었다. 그때마다 이력서가 발목을 잡았다. 대학 전공과 현업이 달랐고, 서른에 신입 딱지를 달아 남들보다 출발이 늦었다. 누가 봐도 구미 당기는 이력은 아니었다. 자기 계발이 돌파구라 생각했었다. 이직을 준비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자기 계발을 떠 올렸고 책을 찾았다. 늘 뒷 북이었다.


#3. 가족

둘만 살았던 1년은 정말 좋았다. 1년 중 10달은 뱃속에 아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이를 낳으며 삶은 180도 변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알려줄 수 없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출산 전 후 요령이 담긴 책을 읽었다. 정독을 했지만 와 닿지 않았다. 현실감이 떨어졌던 것 같다. 세상에 나온 아이를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책에 없는 내용도 있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씩 배워갔다. 첫 아이를 통해 겪은 시행착오는 둘째를 수월하게 낳고 키울 수 있는 지침서가 되어 주었다. 아이가 둘이 되고 커가면서 놓이게 되는 다양한 상황은 또 한 번 도전이었다. 말 못 하는 아기를 키우는 것과 호기심이 왕성해지고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는 아이를 키우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부모의 감정과 아이들의 감정이 부딪힐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었다. 뜻하지 않은 상황을 보다 현명하게 풀어낼 방법이 궁금했다.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다. 어느 책에서 속시원이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아내와 다르게 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 갔다.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고 받아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 같았다. 이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아이들에게 상처 주기도 했다. 책을 통해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그런 아빠였었다.


책은 종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타인의 삶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만큼 다양한 삶이 기록되어 존재한다. 그 기록 안에는 내가 몰랐던 경험도 있고, 내가 정말 알아야 할 정보고 있고, 나를 변화시킬 그 무언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아무리 넘쳐나는 정보가 있다고 해도 스스로 찾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는 거다. 고등학생인 나는 등하교 무료함을 달래 줄 재미가 필요했다. 소설책 몇 권이 짧은 기간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직장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과 부디혔던 내가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책 몇 권을 통해 되지도 않는 자기 계발을 하려고 했었다. 아이도 아이가 처음이고,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부모가 힘과 권력을 이용해 아이를 제압하는 행태는 누구에게도 납득될 수 없고, 훗날 아이들에게 외면받을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손에 책이 들리고부터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이렇게 쉽고 그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어야 할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다. 아이 손에 들린 책은 상상력을 키워 주고, 초중고 때 펼친 책 속엔 미래의 꿈이 담겨 있고, 성인이 되어 만나는 책엔 삶의 방향이 되는 나침반 일 것이다. 삶은 흐른다고 표현하다.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가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닿을 목적지는 분명 다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 지금 어디쯤인지, 어떤 이정표를 보고 가야 하는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수많은 결정 앞에 놓이게 된다.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정보가 많을수록 결정은 만족감을 줄 수 있다. 만족스러운 결정이 곧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 누구나 갖고 있는 권리이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기꺼이 내놓았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그저 원하는 삶을 들여다볼 마음과 시간,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된다. 이전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책을 읽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시도를 해 보면 어떨지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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