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준 Apr 07. 2021

부부의 맛을 더해주는 '배려' 한 스푼

밥상머리에서 배우는 인생

문자메시지를 시작으로 몇 번의 통화 뒤 처음 마주하는 날이었다. 더위가 시작된 6월, 땀 배출이 잘 된다는 칙칙한 기능성 작업복을 벗고 이날을 위해 새 옷을 장만했다. 밝은 베이지색 면바지에 멀리서 봐도 청량감이 드는 하늘색  폴로티를 입고 나갔다. 첫 만남부터 어색함에 서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보다 같이 선택한 영화를 보는 걸로 미세하게라도 거리를 좁혀보려고 했다. 영화를 보기로 한 건 좋았지만 선택한 영화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서로의 취향을 묻고 의견을 좁혀 송혜교 주연의 '황진이'였다. 대충 줄거리를 보고 조선시대 배경의 로맨스를 짐작했지만 한참 잘못짚었다. 로맨스가 없진 않았지만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가물한 걸 보면 인상적인 영화는 아니었던 거다. 영화관을 나오며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실망스러웠다면 그녀도 다르지 않을 거였다. 점심 메뉴에 따라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고 했다. 일산의 중심가여서 먹을 곳은 많았다. 전날 미리 알아 둔 두부요리, 낙지볶음, 냉면 전문점이 후보군이었다. 

"특별히 안 먹는 음식 있어요?"

"아니요. 못 먹는 거 말고는 가리는 건 없어요."

"찾아보니 여기 주변에 두부 요리, 낙지볶음, 냉면 전문점이 있는 데, 이 중 당기는 게 있어요?"

"저는 낙지볶음이 좋을 것 같은데요."

짧은 거리였지만 걷는 동안 땀이 차기 시작했다. 바쁠 점심시간을 지나서 인지 매장 안은 한가했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더위 때문에 갈증도 있었지만 처음 만난 긴장감에 목이 더 말랐다. 이모님이 내어 준 물을 그녀에게 먼저 한 잔 따라주고 내 잔에 따르자마자 숨도 안 쉬고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은 흐르는 땀과 몸 안의 긴장감도 함께 씻겨 가는 것 같았다. 

"낙지 비빔밥 어때요?"

더운 날씨에 철판 볶음이나 전골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먼저 선수를 쳤다. 

"네 괜찮아요."

"여기요! 낙지 비빔밥 2인분 이요."

이때까지는 몰랐다. 낙지 비빔밥이 내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걸.

첫 입에 아차 싶었다. 매워도 너무 매웠다. 나는 매운 음식을 '1'도 못 먹는다. 라면 한 그릇을 먹어도 땀범벅이 될 정도다. 혼밥을 위해 메뉴를 고를 때도 매운 음식은 절대 선택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날은 한 입 먹고 나서야 내가 매운 음식을 먹지 못 한다는 걸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다 비벼놓은 음식을 물릴 수도 없었다. 마주 앉은 그녀는 짐작할 수 없는 나만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한 입 먹고 휴지 2장, 또 한 입 먹고 3장, 밥양이 줄어들수록 그릇 옆엔 땀을 닦아낸 휴지로 쌓여 갔다. 지켜보던 그녀의 눈빛에 측은함이 묻어났다.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먹을 만합니다. 입맛에 맞나요?"

"저는 괜찮은데. 그쪽이 괜찮은지 걱정이 돼서요."

"뭐~ 시원하게 땀 한 번 뺀다고 치죠 뭐."

그녀의 걱정을 넘어 다른 손님이 없던 탓에 이모님들의 관심까지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두고 보고 있던 이모님도 걱정을 가득 담아 한 마디 건넸다.

"정말 괜찮아요? 지켜보고 있으니 너무 땀을 많이 흘리는 것 같아서. 매운 음식 못 먹는 것 같은데 메뉴를 잘못 골랐나 봐요."

"아닙니다. 매워도 맛은 있네요."

다 먹고 나니 땀을 닦은 휴지가 주먹보다 크게 뭉쳐져 있었다. 민망했다. 옷만 입고 있을 뿐 사우나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더울 것 같은 6월의 공기가 오히려 시원했고, 땀에 젖은 몸을 말리기에도 적당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날 당신하고 그 낙지 비빔밥을 먹는 게 아니었는데. 매운 음식 먹지도 못하면서 기어이 그걸 끝까지 먹겠다고 땀을 땀을 쏟는 게 어찌나 불상해 보이던지."

"그땐 왜 그걸 추천했는지 나도 몰라. 아마 당신이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었을 까 싶네."

"밥 먹는 내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땀을 그렇게 많이 흘리는 사람도 처음 봤는데, 그런 사람이 내 앞에서 쩔쩔매며 먹는 걸 보니 더 측은해 보이더라."

"그 날 그 낙지 비빔밥 덕분에 지금 이렇게 함께 살게 된 거 아니겠어. 나의 큰 그림에 당신이 걸려들었지."

"큰 그림은 무슨. 내가 마음이 넓었으니 두고 봐 준거였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뭐야 이 사람' 하고 다음 날부터 연락 안 했을 걸."

 

13년째 결혼 생활을 이어오는 동안 음식에 다툼이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매운 음식에 대한 서로 다른 취향을 존중해 주는 게 전부다. 아내는 처음 낙지 비빔밥으로 함께 식사를 할 때, 매운맛에 땀을 쏟아도 열심히 먹는 모습이 자신에 대한 배려로 느껴졌다고 했다. 나도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내 행동을 이해해준 아내에게 고마웠다. 하루에 한 끼를 먹을 때도, 세 끼를 함께 먹을 때도 있다. 늘 먹던 메뉴의 반복이지만 상 앞에 놓인 음식을 대하는 마음은 매번 다를 수밖에 없다. 살면서 겪는 수많은 일과 서로에 대한 감정이 수시로 변하기에 눈 앞에 놓인 음식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배려'와 '이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간단한 음식이라도 그걸 만드는 데는 '정성'이 안 들어갈 수 없다. 간혹 미운 마음이 더 클 때도 있겠지만 음식을 준비하는 그 자체로 서로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하기에 가능한 거라 생각한다. 내가 만든 음식으로 상대방이 배고픔을 달래고 먹는 즐거움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도 상대방이 좋아하면 기꺼이 만들어 줄 수 있는 마음. 이런 마음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 없이는 쉽게 생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음식을 요리할 때 내가 먹기보다 상대방을 위해 만드는 경우가 더 많을 거다. 즐겁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고, 건강하길 바라고, 먹는 그 순간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 지지고 볶으며 서로의 감정에 상처를 주는 대신, 신선한 재료를 지지고 볶아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게 더 건강한 부부 사이가 될 거라 생각한다.  


이전 08화 여보! 오늘 점심은 내가준비할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