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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18. 2021

설거지라 부르고 '물 멍'이라 쓴다.

밥상머리에서 배운 인생

조4모3.

출근 때 4번 갈아타는 지하철. 퇴근 때 3번 갈아타는 지하철.


6시 5분 지문 등록기에 퇴근 기록을 남기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또 3번을 갈아타고 가야 하나? 지하철 3번을 갈아타는 동안 앉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자리가 나도 4-5 정거장 가고 갈아타야 해서 앉는 게 귀찮기도 하다.  지하철을 1번 갈아타고 버스를 타나, 3번을 갈아타고 가나, 도착하는 시간은 차이가 없다.  영등포역에서 버스를 타면 앉아서 한 번에 갈 수 있다. 버스를 타러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2시간 동안의 퇴근 여행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두 아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몸동작으로 반갑게 맞는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면, 큰 딸은 자기 방으로, 작은 딸은 TV 앞으로, 아내는 저녁밥을 준비한다.


저녁은 멸치로 육수를 낸 떡만둣국이었다. 쫀득하게 익은 떡과 식감이 살아 있는 물만두를 온몸으로 감싸는 달걀이 색감을 내고, 그 위에 김가루가 부족한 간을 잡고 참기름으로 향을 더했다. 반찬 중 센터는 단연 파김치다. 얼마 전 장모님께서 아내가 좋아하는 파김치를 보내주셨다.  갓 나온 알싸한 맛이 살아있는 풋풋한 파를 하나하나 손질해 씻고 양념에 버무려 혼자 들기도 버거울 만큼을 보내주셨다. 씹을수록 쫀득한 떡국에 파김치 한쪽을 입에 넣으면   파 향이 가득 퍼지며 식욕을 돋아준다. 숟가락에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덩달아 젓가락도 정신없이 파김치를 집어 나른다.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래 천천히 맛을 즐기는 게 음식에 대한 예의다.'

입은 빠르게 씹고 있지만 머리는 차분해지길 요구한다. 그래도 이 조합에서 이성 만을 강조하는 것 또한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국그릇으로 한 그릇 반을 먹었다. 만들어놓은 걸 다 먹었다. 맛있게 잘 먹는 것만큼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는 것도 드물다. 이 기분을 이어 설거지 명상을 시작한다. 영적인 스승들은 특별한 곳에서 격식을 갖추고 해야만 명상이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격이 없이 정신을 집중할 수 있으면 그 자체로 명상이 된다고 했다. 싱크대 안에 무질서하게 놓인 그릇들에 묻은 음식물을 닦아내고, 거품을 씻어 내며 원래의 자리를 찾아주는 과정은  직장인의 일상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출근길에 사람들에 치이고, 직장에서 일과 상사에 치이고, 퇴근길에 또 사람들에 치이며 집으로 돌아온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치이고 시달리다 보면 나는 내가 아닐 때가 많다. 그렇게 사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살아야만 그나마라도 유지할 수 있는 게 월급쟁이다. 그렇다고 싱크대에 어지럽게 널린 씻지 않은 그릇들처럼 살 수는 없을 거다. 그래서 설거지를 한다.


그릇에 묻은 음식물을 닦아내며 감정의 찌꺼기도 닦아낸다. 그릇에 묻은 세제를 씻어내며 생각의 거품도 씻어낸다. 깨끗해진 그릇을 제자리에 찾아주며 얽혀있던 생각과 감정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10여 분 동안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비로소 제대로 된 휴식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몸과 정신, 감정이 제 자리를 찾는 것 같다. 한재우 작가의 <태도 수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설거지를 하는 목적이 설거지 그 자체인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들은 마치 산책을 하거나 기도를 할 때처럼 애써 소요 시간을 줄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기고 그 순간에 최대한 존재하는 것이, 그들이 설거지를 하는 목적이다. 이것이 빌 게이츠와 제프 베조스의 설거지다. 이는 틱낫한 스님이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것과 같다'라며 일상에서 실천을 권유한 설거지 명상과도 일치한다."


장작이 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걸 '불멍'이라고 한다. 장작이 타는 모습과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진다고 한다.  설거지를 하며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보고 있는 걸 '물 멍'이라 이름 붙였다. 물 멍한 10여 분 동안 그릇을 닦고, 씻어내는 행위에 집중하며, 하루 동안 어긋났던 나를 다시 맞추며, 내일 쓸 힘을 그러모은다. 불멍도 좋고 물 멍도 좋다. 틀어진 하루를 바로 잡아주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내가 설거지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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