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에서 배운 것들
“자기야, 지금 엄마한테 연락받았는데 보민이가 열이 많이 나서 지금 응급실에 있다고 하네.”
“뭐! 응급실? 왜? 열이 얼마나 났는데?”
“몰라 정확한 건 가봐야 알겠지. 일찍 올 수 있어?”
“알았어. 서둘러 갈게.”
병원으로 오는 동안 보민이는 응급실에서 1인실로 옮겼고, 아내가 지키고 있었다. 의사를 만난 아내는 하루 정도 지켜보며 몇 가지 검사를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장모님은?”
“내 얼굴 보고 집으로 가셨지.”
“장모님이 많이 놀라셨겠네.”
“병원에서 엄마 보고 깜짝 놀랐다. 집에서 입고 있던 옷에 슬리퍼만 달랑 신고 있더라고.”
“정말? 이 추운데? 정말 놀라셨나 보네.”
보민이가 태어난 지 60일쯤 지난 1월 중순에 일이었다. 오전 내 멀쩡하던 아기가 오후가 되면서 열이 나더니 해열제를 먹였는데도 40도까지 올라 무조건 들쳐 엎고 응급실로 뛰었다고 하셨다. 아기가 찬바람을 맞을까 봐 아기용 담요만 덮은 채로.
칠순을 앞둔 장모님은 막내딸 부탁에 망설임 없이 옷가방 하나만 들고 와주셨다. 2남 2녀를 키웠지만 다시 갓난아기를 돌보는 건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그래도 막내딸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게 있으셨는지 어떤 조건도 없이 한 달음에 와주셨다. 그 덕분에 아내는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다. 장모님도 막내딸이 한참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아이 때문에 쉬어야 하는 걸 못마땅해했다. 그런 마음도 결정하는 데 한몫했을 거라 짐작만 할 뿐이다. 솔직히 아직도 장모님이 어떤 마음으로 결정을 하셨는지 모른다. 장모님은 큰 아들이 세 딸을 키울 때도 육아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큰 아들이 서운함을 느낄 만큼 전혀 도움을 안 줬다. 그래서 우리가 부탁을 했을 때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기꺼이 돌봐주겠는 대답을 듣고도 장모님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8년 동안 두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었던 건 모두 장모님 덕분이었다.
장모님은 말수가 적으셨다. 실없는 농담도 안 하신다. 나도 말수가 적다. 특히 집에서는 더 말이 없어진다. 장모님이 아이를 봐준 8년은 잦은 이직으로 직장 생활도 불안했던 때였다. 바깥일이 잘 안 풀린다는 핑계로 집에서는 입을 닫고 있었다. 둘러앉아 저녁을 먹어도 농담 한 마디 없이 묵묵히 밥만 먹었다. 장모님은 맞벌이를 하는 우리를 위해 매일 저녁 반찬을 준비해주셨다. 보민이 낮잠 자는 동안 반찬 한두 가지를 매일 준비해 주셨다. 그러니 아내도 퇴근하면 살림 대신 보민이를 돌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매일 저녁을 준비하는 장모님을 위해 가끔은 배달 음식을 먹기도 했다. 보쌈 한 접시 시켜놓고 막걸리 한 잔을 먹는 게 유일한 술자리였다. 내가 유일하게 말수 느는 때가 술자리이다. 마시는 술의 양에 비례에 말 수도 늘어난다. 그렇다고 장모님 앞에서 취할 정도로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막걸리 한 잔 먹고 용기 내 말을 건넸다. 익숙하지 않은 대화라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순간의 어색함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몇 마디 못하고 조용히 보쌈만 집어 먹었다. 살가운 사위가 되겠다는 다짐의 말도 했지만 함께 사는 동안 처음보다 가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모님은 퇴근 한 우리가 아이를 보기 시작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혼자만의 시간이라고 특별한 걸 하는 건 아니었다. 매일 같은 시간 방영하는 일일 드라마를 즐겨 보셨다. 그 시간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으셨다. 짐작컨대 장모님의 일과는 저녁에 보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든 안 먹든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TV 앞에 있어야 했다. 그 때문에 아내와 나도 빼놓지 않고 드라마를 챙겨봤다. 두 아이도 커갈수록 드라마에 빠져들고 있었다. 드라마를 빨리 배운 건 둘째 채윤이었다. 채윤이는 유난히 장모님을 잘 따랐다. 보민이는 아내와 내 성격을 닮아 조용했지만, 채윤이는 정 반대였다. 말도 많았고 늘 활기찼다. 그런 성격이 장모님과도 잘 맞았다. 늘 옆에 붙어서 장모님이 보는 걸 똑같이 보고, 본 대로 따라 했다. 그런 채윤이를 지켜보는 게 장모님의 낙인 것 같았다. 장모님은 또 시간이 날 때면 늘 책을 읽으셨다. 잠들기 전이나 아이를 보지 않아도 되는 휴일엔 어김없이 책을 읽으셨다.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아이가 책을 읽기 바라는 마음으로 월급의 반을 털어 전집을 장만했었다. 결국 장모님을 위한 전집이 되었다. 늘 방에서 두 발을 뻗어 포개고 그 위해 책을 올려놓고 보셨다.
친구도 없고, 돈벌이도 할 수 없는 곳에서 그저 막내딸을 위해 손녀를 돌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8년을 함께 했다. 당신의 아이를 키울 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다. 편하지 않은 사위 눈치를 보는 게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 낮에 일하느라 고생하는 딸과 사위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챙겨 주기 위해 매일 반찬을 만든 것도 만만하지 않았을 거다. 갓난아기가 당신 때문에 어떻게 될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을 거다. 내복을 껴입어도 추운 날씨에 티 한 장 달랑 입고 병원까지 정신없이 뛸 땐 모든 게 당신 탓인 것 같았을 거다. 8년 동안 한 결 같은 정성으로 두 아이를 키워주신 덕분에 아내와 나도 걱정 없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두 아이에게 한글을 일찍부터 가르친 덕분에 또래보다 말이 빨랐던 것도 감사한 일이다. 퇴근 후 몇 시간 보는 것도 쩔쩔맸던 우리가 장모님 도움 없었다면 지금처럼 잘 키울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고마운 장모님께 좀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던 게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사위는 손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여전히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다. 벽은 언제든 허물 수 있다. 의지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