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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Nov 01. 2021

어느 회사나 이런 상사 꼭 있다

못하는 건 접어두기로

주어진 사자성어를 다섯 명의 출연자가 음악을 크게 튼 헤드폰을 쓴 채 한 사람씩 전달하는 게임이 있다. ‘천고마비’라는 단어를 처음 전달받은 출연자는 들리지 않는 다음 동료에게 단어를 맞출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 본인도 음악 때문에 들리지 않아 말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몸동작까지 더해진다. 상대방은 입모양과 몸동작만으로 정답일 거라 짐작되는 사자성어를 또 다음 출연자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정답을 아는 시청자는 엉뚱하게 전달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네 명을 거쳐 마지막 출연자가 정답을 외친다. ‘천일야화’ 정답을 맞히기보다 엉뚱한 답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이 하는 말이 들리면 맞출 수 있는 문제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기 때문에 틀린 답을 말하게 된다. 이런 게임은 시청자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설정이라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도 이런 게임 같은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게임처럼 안 들리는 상황이 아니어도 올바른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간 여유 있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꼼꼼하게 만들어봐. 이번에 잘 만들어놓아야 두 번 일하지 않게 될 테니까.”

결과물은 본 사장님의 첫마디였다. 처음 지시를 받고 3주지나 첫 피드백을 받았다. 꼼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업무 효율을 위한 새로운 양식을 만든다는 건 쉬운 작업은 아니다. 업무와 관련된 모든 직원에게 설명하고 의견을 듣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 뒤 최종 결재를 받아야 비로소 실무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처음 계획을 세우는 담당자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실무자의 업무 효율을 위해 불필요한 서류를 없애거나 줄이는 건 기업의 경쟁력과도 연결된다. 이때 실무자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결재권자의 의견도 반드시 필요하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결재권자의 의견이나 목적을 전달받으면 방향 설정이 수월해진다. 어쩌면 그게 일의 순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3주 전 사장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한 마디에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했고, 그 결과물을 본 사장님의 반응은 ‘이게 뭐야’라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건 이다음부터다.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에 사장님의 피드백은 다시 한번 더 발전시켜 보라고만한다.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무엇을 더 보충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없이 말이다. 거기에 대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되물으면 나만 무능한 직원이 되는 꼴이다. 조용히 서류를 챙겨 들고 내 자리로 돌아와 다시 고민에 빠진다. 이때부터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혼자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사장님의 입모양만 보고 정답을 맞혀야 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다시 2주 뒤 결과물을 만들어 갔다. 

“그래, 지난번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것 같네. 근데 말이야 이 부분은 빼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여기 이 내용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김 차장은 어때?”

“그 부분을 표시 한 건 사장님이 현장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만들었습니다. 필요 없으시다면 빼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제출했을 때도 있었던 내용을 이제야 언급한다. 두 번 일하는 꼴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매번 이런 식이다. 처음부터 꼼꼼하게 검토했으면 고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직원들에게 효율을 강조하면서 정작 본인은 비효율을 몸소 실천하는 꼴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똑같은 상황은 그 뒤로도 한 달 동안 이어졌다. 직원들의 업무 효율을 위해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자는 취지가 무색하게 그 과정은 엉성 그 자체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장님이 바라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지시했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 거다. 아니면 계획을 세우는 당사자에게 위임한 후 구체적인 피드백을 통해 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했을 수도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시간 낭비에 힘만 빼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렇게 3개월 맨땅에 헤딩한 끝에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양식도 직원들이 사용하다 보면 문제점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엉성한 계획이라도 의견을 모아 시행한 뒤 사용자의 직접적인 피드백을 통해 수정 보완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직원 개개인의 귀를 열고,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 의사소통하며 정답을 찾아가는 게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어내지 않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회사라는 조직은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듯 단계를 거쳐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의사결정 과정은 소통이 바탕이 된다. 중간에 한 사람이 도 귀를 막으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없다. 귀를 막으면 상대방의 입모양만 보고 답을 맞히는 꼴이다. 그렇게 나온 답이 정답 일리 없다. 나는 직장을 많이 옮긴 편이다. 한 직장에 짧게는 6개월, 길게는 5년 이상 근무했었다. 직원이 10여 명인 작은 회사도 경험했고, 한 해 매출 1천억이 넘는 기업에도 다녀봤다. 조직이 작으면 작은대로 의사결정 과정이 흐리멍덩했고, 조직이 큰 곳은 지나치게 많은 단계를 밟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어느 조직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마다 원칙과 체계가 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조직이 크든 작든 중간에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이 꼭 한 명은 있었다는 점이다. 사다리의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일수록 의사결정 과정에 손이 많이 갔다. 앞선 경우처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사례가 자주 있었다. 더 중요한 건 귀를 막고 있는 당사자가 자신이라는 걸 그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노력이 조직을 위한다고 알고 있다. 그게 조직을 위한 그들만의 충성심 같은 거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로 인해 정작 실무 직원들은 매일  상상의 나래를 펴며 그들의 입모양만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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