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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03. 2022

이것도 효도라면

"엄지 손가락이 골절이라더라. 깁스할 정도는 아닌데 저절로 움직여지지가 않네."

"내일 일찍 갈 테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세요."

"다 해놨어. 와서 전 만 부치면 된다."

절에 다니는 어머니는 아침마다 노트에 법문을 옮겨 적는다고 했다. 매일 꾸준히 적은 덕분에 몇 권을 완성해 제출했고 주지스님에게 좋은 말씀을 들었다고 했었다. 명절을 앞두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며칠 옮겨 적기를 못했고, 밀린 분량을 몰아서 하다가 손가락에 무리가 간 것 같다고 전했다. 진료를 담당했던 의사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고 했지만 펜을 쥐기 불편해 글 쓰는 건 당분간 멈췄다고 했다. 대신 매일 조금씩 음식을 준비해 놓았던 것 같다. 


설 전날 11시께 어머니 집에 도착했다. 전만 부치면 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갉은 고기에 두부와 당근, 소금, 후추로 간을 해놓았다. 고기 반죽을 떼어먹기 좋은 크기로 빚어주기만 하면 됐다. 굽는 건 당신이 직접 하시겠단다. 하지 말라고 했지만 기어이 듣지 않는다. 1시간도 안 걸려 고기완자, 동태전, 깻잎전을 완성했다. 예년에 비해 고기 반죽 양을 반으로 줄인 덕분이다. 손님을 치르는 것도 아니라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기꺼해야 우리 네 식구가 먹는 게 전부였다. 전만 부치면 다 끝난 줄 알았다. 더 할 것 없다고 우리를 안심시킨 뒤 점심밥을 차려 먹었다. 점심에 먹으려고 미리 돼지갈비찜까지 만들어 놓았다. 손이 불편하다면서 할 건 다 해놨다. 밥 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주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내가 곁에 있긴 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생선을 굽고 나물을 다듬어 데치고 무치는 모든 걸 당신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분이다. 결국 아내와 나는 전만 부쳤다. 


점심을 먹고 이어진 일이 해가 진 뒤에야 끝났다. 저녁밥을 먹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그 사이 우리 손에 들려 보낼 짐이 한 보따리였다. 냉장고와 수납장 곳곳을 차지하고 있던 식재료 들을 잔뜩 꺼내 담았다. 예전 같으면 툴툴거렸을 거다. 한 마디 안 했다. 주는 대로 받았다. 담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가 보다. 그렇게 담아간 음식 중 처치 곤란도 있었지만 일단은 받아왔다. 어쩌다 한 번, 명절에 한 번씩 찾아오는 자식에게 주기 위해 적금 붓듯 냉장고와 수납장 곳곳에 차곡차곡 쌓아두었을 테다. 그렇게 챙겨주는 게 유일한 낙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음식 많이 하려는 장모님. 따님들아! 머라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인정해주고 도와줘라. 효도가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이것이 효도 인기라. 어른들은 바꾸기 어렵다. 걍 인정해 줘야 한다."


매일 함께 글을 쓰는 문우님께서 명절 마지막 날 올린 글이었다. 어른들은 바꾸기 어렵다는 말이 와닿았다. 자식 입에 들어갈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한평생을 살아왔다. 하루아침에 바뀔 게 아니었다. 당신이 바뀌길 바랄게 아니라 자식인 우리가 인정해주는 게 더 나았을 테다. 설 아침 차례를 지내고 점심까지 먹고 일어나는 우리 손에 또 한 보따리가 들렸다. 말없이 받아 들고 나왔다. 이것도 효도라고 쳐준다면 기꺼이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계약은 된다. 출판사만 정해지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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