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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30. 2022

한 치 앞을 내다보는 인생 예고편

못하는 건 접어두기로

영화를 좋아해 극장에 자주 간다.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단순하다. 영화다운 영화를 좋아한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을 경험할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극장을 찾는다. 제목에 이끌려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예고편을 통해 대략적인 느낌을 갖고 간다. 틈틈이 포털 사이트 영화 카테고리에 올라오는 예고편을 즐겨 보는 편이다. 예고편은 한 편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느낌의 영화일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어떤 영화는 예고편 때문에 흥행에 성공하기도 한다. 물론 본편을 본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켜준다면 흥행은 당연하다. 반대로 예고편이 엉성하거나 아예 없다면 그만큼 흥행도 기대할 수 없다. 예고편의 역할은 본 편에 대한 기대와 흥미를 이끌어 낸다. 반대로 당장 1초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우리 인생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예고가 없다.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말이다. 그러나 예고 없이 일어날 것 같은 일에도 예고편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날도 평소와 같은 시간 집을 나섰다. 7백 만 원 주고 산 10년 넘은 중고차가 내 발이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에 올랐다. 늘 가던 길이었고 새벽이라 차도 없었다. 출발한 지 10분 만에 차가 멈췄다. 그것도 도로 한가운데 1차선이었다. 엔진룸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차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시동이 꺼졌다. 다시 시동을 걸어봤지만 먹통이었다. 여러 번 반복해도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견인차를 불렀다. 견인차가 오는 동안 도로 한가운데서 다른 차가 비켜갈 수 있도록 수신호를 해야 했다. 어두운 도로 한가운데서 달려오는 차에게 맨손으로 신호를 하고 있는 상황이 어이없었다. 아무리 중고 차이지만 구입한 지 6개월도 안 됐다. 차를 살 때 중개업자는 깨끗하게 수리되었다고 했다. 겉만 말끔하게 손을 봤던 것 같다. 내부 부품 상태가 어떤지는 중개업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견인차가 왔고 가장 가까운 정비소 옮겨졌다. 차를 뜯어본 정비사는 수리비로 2백만 원이 넘겠다며 견적서 건넸다. 더 어이가 없었다. 7백 만 원을 준 중고차가 졸지에 1천 만 원짜리 차가 되었다. 안 고칠 수도 없었다. 끊어 오르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중개업자에게 전화를 했다. 한참을 실랑이했지만 결론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 뿐이었다. 이 일을 겪고 다시는 중고차를 안 사겠다 고 다짐했다. 차는 둘째치고 중개업자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팔면 그만이라는 식의 영업 때문에 애먼 나 같은 소비자만 피해를 보는 것이다. 개중에는 양심적인 중개업자와 뽑기 운이 겹쳐 문제없는 중고차를 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수 백 에서 수 천만 원이 오고 가는 거래를 운에 맡겨야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안 좋은 경험이었지만 이런 일을 겪은 다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배우게 된다. 물론 나처럼 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영화의 예고편처럼 책이나 글에서, 유튜브,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미리 배울 수도 있다. 중고차를 사기 전 알아야 할 팁, 차 상태를 점검하는 체크리스트, 계약 시 유의사항 등 미리 찾아보면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내용이다. 아마 그런 내용을 올리는 그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다른 사람에 도움을 주고자 만들었을 수 있다.       


우리 각자의 인생에도 이 같은 예고편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우리는 저마다 살아오면서 자신만이 겪은 경험들이 있다. 상황과 대상은 달라도 크게 억울했던 일, 화가 났던 일, 수모를 겪은 일,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 슬픔에 힘들었던 기억, 이별의 아픔 등 다양한 일을 겪으며 성장해왔다. 이런 경험들은 간격을 두고 반복된다.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상황을 받아들이는 이해의 크기도 달라진다. 직장을 예로 들면 신입 때 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중간 관리자가 되었을 때와 임원이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다. 경험이 부족한 신입과 30년 이상 같은 일을 해온 상사의 접근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경력과 경험이 많다는 건 같은 일을 오랜 시간 반복했다는 의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과정과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예측이 가능하면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신입과 상사의 차이가 여기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때 상사의 머릿속에는 예고편을 보고 그 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뒤에 이어질 상황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이런 능력이 반드시 같은 경험을 반복하고 오랜 시간 경력이 쌓여야만 생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었던 실수를 통해 무엇을 배웠고 어떤 건 버려야 할지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그 일에 대해 정보를 찾고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도 실수를 줄일 수 있다. 내가 중고차를 사기 전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여러 정보를 찾아봤다면 뒤통수 맞는 일을 피할 수도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일상은 선택의 연속이다. 밥을 먹을 때, 옷을 살 때, 집을 구하고 자동차를 살 때, 여행을 준비하고 이직을 준비하는 모든 순간에 선택이 따른다. 먹어본 음식이 많을수록 선택이 수월하다. 다양하게 입어보면 장단점을 알 수 있다. 이사를 자주 다녀보면 좋은 집을 고르는 안목이 생긴다.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선택이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잘 만든 예고편이 선택을 수월하게 해 주듯 말이다. 물론 경험이 많다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도, 예고편을 잘 만들었다고 재미있는 영화라는 보장은 없다. 중요한 건 내가 경험했던 것들에서 무엇을 남겼는지 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경험이고, 더 나은 선택을 했다면 의미 있는 경험일 것이다.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면 더 나은 선택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소설가 이문열은 50권을 출간 한 뒤 비로소 베스트셀러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50번의 실패 경험이 더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일상도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다. 어떤 실패의 경험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단, 그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노력이 있을 때만 말이다.      


우리는 한 번 겪은 경험을 똑같이 반복할 수는 없다. 대신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잘하고 잘못한 부분을 마음에 새길 수는 있다. 떠올리는 과정을 글로 적으며 구체화하고 여기서 얻은 교훈을 통해 실패를 줄여갈 수 있다. 이렇게 글로 적는 과정이 살면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예고편이라 생각한다. 예고편을 잘 만 들수록 흥행에 성공하듯, 내가 겪은 경험의 예고편이 쌓일수록 실수와 실패를 줄일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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