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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Oct 12. 2022

우리 가족 참 열심히 산다

2022. 10. 12.  17:51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내는 둘째 딸.


부모님 동의가 필요하다며 종이 한 장을 내밉니다. 고양시에서 주최하는 학교 대항 달리기 대회 참가 희망서입니다. 경쟁을 통해 각 학년별 대표를 선발하는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초롱한 눈망울로 반드시 학년 대표가 되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아내는 번거로운 걸 싫어합니다. 만약 선발이 되면 매일 1시간 정도 일찍 등교를 해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침밥을 책임지는 아내에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이의 뜻을 꺾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6살부터 태권도를 시작해서 몸이 날렵합니다. 아니, 태어난 지 10개월 만에 걷기 시작했고, 그날 이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아이입니다. 잠을 잘 때 빼고요.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면 무조건 뛰어야 되는 아이입니다. 걷는 건 배우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오랫동안 운동을 해서 허벅지에 근육이 만져질 정도입니다. 그러니 달리기 대회를 그냥 지나칠 아이가 아닙니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아이도 아니고요. 어제 선발전을 치렀고 당당히 3학년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아이입니다. 학습지만 펼치면 몸에서 신호가 오는가 봅니다. 안 할 수는 없으니 몇 분만에 후다닥 풀고 얼른하고 싶은 걸 합니다. 공부머리가 아예 없지 않아서 급하게 풀어도 대부분 맞는 답을 씁니다. 부모 욕심에 조금만 취미를 붙이면 공부도 곧잘 할 것 같습니다. 책상에 앉혀 놓을 수는 있어도 책을 펼치는 건 온전히 아이의 몫입니다. 부모 뜻과 달라서 속이 터져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공부가 필요한 때를 스스로 느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도 예체능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태권도는 물론 피아노도 진심을 다해 배웁니다. 얼마 전 모 신문사 주최 콩쿠르에서 특상을 탔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아이입니다. 또 앞으로 아이들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춤과 노래 연습을 거르지 않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놔두면 뭐가 되고 될 아이라고 믿고는 있습니다. 


조용히 강한 큰딸


토요일 아침이면 살벌한 기운이 감돕니다. 주중에는 학교 때문이라도 학원을 갑니다. 주말에는 쉬고 싶지만 수학 학원이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주 3일 수업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토요일 12시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2년째 듣고 있습니다. 2년째 살얼음판입니다. 집을 나서기 전까지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합니다. 말을 걸었다가는 독을 잔뜩 품은 뱀에게 물리는 꼴입니다. 아내도 저도 눈치만 봅니다. 정도 심할 땐 학원을 그만둬도 된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만두는 건 무조건 싫다고 합니다. 그럼 어쩌라는 건지. 투덜대면서도 기어이 학원을 갑니다. 빠지는 날 없이 꾸역꾸역 갔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지만 진도는 중학교 3학년 내용을 배우고 있습니다. 문제도 곧잘 풉니다. 저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저는 중1 때부터 수포자였습니다. 부디 제 딸만은 수학을 포기 않았으면 했고, 그 바람을 큰딸이 들어주고 있습니다. 


영어는 수학보다 늦게 시작했습니다. 본인이 하고 싶은 때에 맞춰 보냈습니다. 영어도 주 3일 갑니다. 한 번에 2시간씩, 쪽지 시험을 못 보면 1시간씩 더 나머지 공부를 합니다. 처음 몇 달은 1시간씩 늦게 끝나도 꿋꿋이 버텨냈습니다. 제법 실력이 쌓인 요즘도 가끔 쪽지 시험을 보고 30분 정도 나머지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좋아서 시작한 공부인지 지치지 않고 잘 해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만점자에게 2만 원권 문화상품권 타이틀이 걸린 시험을 봤습니다. 아깝게 한 문제 틀려서 받지 못했습니다. 시험 보기 전 만점을 바라지도 않고 네댓 개만 안 틀려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막상 시험을 보고 나니 이해하지 못했던 한 문제 틀린 것 말고는 잘 봤다고 합니다.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부모가 힘이 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주말도 없는 만학도, 아내


저의 꼬드김에 대학원을 진학했습니다. 몇 달을 고민한 끝에 지원했습니다. 앞뒤 사정 생각하지 않고 일단 시도해보자고 했습니다. 첫 학기는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됐습니다. 퇴근 후 집에서 수업을 들으니 그나마 몸은 편했습니다. 과제도 주중에 부지런히 하면 해낼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낯선 사람, 생소한 수업을 들으며 한 한기를 보냈습니다. 마흔 중반에 시작한 공부였지만 실력은 녹슬지 않았나 봅니다. 4.5만 점으로 1학기를 마쳤습니다. 생경한 숫자였습니다. 대학 내내 3.0이 최고였던 저였으니까요. 


2학기는 사정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대면 수업으로 바뀌면서 퇴근 후 등교, 끝나고 집에 오는 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닙니다. 파주에서 연신내까지. 버스로 통학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고 합니다. 문제는 과제입니다. 4과목을 듣는데 각 과목마다 과제 양이 혀를 내두릅니다. 2학기가 시작되면 지금까지 주말에 편히 쉬는 모습을 못 봤습니다. 살림은 살림대로, 과제는 과제대로.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다시 책상에 앉아 새벽까지 과제가 이어집니다. 주중 수업을 듣는 삼일은 제가 살림을 하고 있지만 과제에는 별다른 도움을 못줍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전공과목이니 제가 봐도 모르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저는 살림이라도 잘하려고 합니다. 


이제 이 글도 마무리하고 아이들 저녁밥 해주러 가야겠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내가 살림에 신경 쓰지 않게 바지런히 집 청소, 빨래도 정리해 놔야겠습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우리 가족 참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잘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2022. 10. 12.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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