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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Oct 28. 2022

전지적 아내 시점

2022. 10. 28.   07:41




아침부터 원장님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청소 상태부터 하원 문제까지. 적은 늘 가까이 있다는 게 맞다. 아군에게 총질하는 게 분명 원장님은 같은 편은 아닌 것 같다. 원장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만든 걸 수도 있고. 어쩌면 같은 월급쟁이니 이해하는 게 맞겠다. 그래도 기분은 음식물 쓰레기다.


5시, 가방을 메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침에 이어 또 총질이 시작됐다. 제발 나는 피해 가길. 나는 갈 길이 멀단 말이요. 음식물 쓰레기 같은 기분을 겨우 씻어냈는데 이제와 또 그러면 안 되지. 마음이 통했나, 별 일 없이 인사만 남기고 빠져나왔다. 이제부터 전력질주다. 지하철 시간을 맞추려면 뛰고 또 뛰어야 한다. 놓치면 지각이다. 가는 길이 제법 익숙해졌다. 효과적인 경로를 찾았다. 걸음 수를 줄이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래 봐야 몇 분이지만, 늦었을 때 이마저도 아쉽다. 


6시 30분, 저녁밥도 못 먹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샌드위치를 사긴 했지만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수업에 샌드위치는 온기가 더해진다. 10시 5분, 수업이 끝났다. 다시 발걸음이 바쁘다. 차가 적은 시간이라 버스만 타면 정체 없이 갈 수 있다. 오늘은 운이 별로인 것 같다. 버스에 빈자리도 안 보인다. 옆에 선 아저씨는 삼겹살에 소주를 먹었는지 체취가 진하게 전해진다. 냄새에 배가 요동친다. 가방에 잠든 샌드위치가 애처롭다. 냉장고에서 날 기다리는 맥주가 생각났다. 치킨을 한 마리 시켜먹을까? 남편한테 안주 좀 만들어놓으라고 할까? 배고프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오늘도 두 딸의 자는 모습만 본다. 남편도 목소리에 잠이 한가득이다. 설거지, 빨래, 청소 나름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졸려도 참고 기다려준 게 고맙다. "저녁 안 먹었으면 뭐라도 해줄까?" 묻는 말에 괜찮다고 했다. 뭐든 먹기에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몇 마디 주고받고 남편은 자러 들어간다. 거실에 혼자 남아 뭘 할지 고민한다. 그냥 잘까? 과제를 할까? 아니면 버스에 생각한 맥주 한 잔 마실까? 오늘은 맥주다. 안주는 김, 과자. 한 모금 넘기니 땀구멍들이 열린다. 두 모금에 팔과 다리가 힘을 뺀다. 세 모금에 눈꺼풀이 문을 닫겠다며 속삭인다. 네 모금째, 눈꺼풀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결국 몸을 뉘었다. 전기장판의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일하며 공부하는 아내의 하루입니다.  늦은 시작이라 선택 앞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면 뭐라도 얻을 수 있겠다며 결심을 세웠습니다. 결심하고부터 앞만 보고 달리는 중입니다. 주 3일 학교 가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지하철,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 남짓 왕복하는 것도 체력에 부칠 겁니다. 밥도 제때 못 먹고, 먹어도 간단한 걸로 대충 때우기 일쑤입니다. 과제는 또 왜 그리 많은지. 휴일에도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살림하고 돌아서면 책장에 앉아 과제만 합니다. 투덜거리기는 해도 빠짐없이 해 갑니다. 노력한 만큼 인정도 받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것도 재미있나 봅니다. 말도 많아지고 주제도 다양해집니다. 조금씩 전문가 다워지는 게 보입니다. 25년 동안 유치원 교사로 일한 경험이 지금 공부에 좋은 토양이 된 것 같습니다. 그 땅에서 남은 삶을 버틸 건강한 싹이 자라고 있습니다. 줄기가 뻗고 잎이 나면서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춰갈 것입니다. 아내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든든한 버팀목과 시원한 그늘이 되어줄 거로 믿습니다.


2022. 10.2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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