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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Nov 19. 2022

아빠는 마라탕이 싫더라

2022. 11. 19.   06:24


마트를 다 털어온 것처럼 잔뜩 쌓였던 먹을거리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정신없이 카트에 옮겨 담으며 이래도 되나 싶었습니다. 오랜만에 와서 살 게 많은 거라고 최면을 걸었습니다. 장바구니 두 개에 옮겨 담아 드는 데 숨겨왔던 근육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헬스장 아령보다 장바구니가 더 운동이 될 것 같습니다. 

냉장고와 수납장에 정리하면서 한동안은 먹을 걱정 없겠다 싶었습니다. 웬걸요,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다시 반찬 걱정이 시작됩니다. 먹을 게 떨어진 걸 누구보다 빨리 눈치챈 둘째 딸이 퇴근하는 저에게 묻습니다. "아빠 오늘 저녁은 뭐야?" 이미 식재료는 바닥이 나서 해줄 게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찰나를 놓치지 않고, "아빠 금요일 저녁인데 맛있는 거 시켜먹으면 안 돼? 마라탕 먹고 싶은데 응?" 학원 갔다 와서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주방에서 마주한 현실은 더 참담했습니다. 만들어놓은 반찬은 어제부로 다 먹고 없었고, 국을 끓일만한 재료도, 반찬을 만들만한 재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수시로 냉장고를 열어보는 두 딸은 이미 저녁으로 맛있는 걸 시켜 먹겠다고 각오가 섰던 것 같습니다. 근데 왜 하필이면 '마라탕'이냐고. 아빠는 마라탕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서 먼저 저녁밥을 먹기로 합니다. 남아 있는 어묵탕을 데우고, 지난주에 담근 김장 김치를 꺼내고, 전날 먹다 남은 스팸을 전자레인지에 돌렸습니다. 먹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아빠는 배가 고파서 먼저 밥을 먹었다. 마라탕을 시켜줄 테니 너희 둘이 맛있게 먹으면 좋겠구나.' 마라탕이 싫다는 표현 대신 궁색한 변명을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마라탕을 사이에 두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 마라탕을 싫어한다고 말하면 아이들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주되, 배려의 표현으로 덜 불편했으면 싶었습니다. 그런데 둘 다 묻지를 않네요. 

주문한 마라탕이 도착하고 먼저 온 둘째가 먹을 수 있는 만큼 덜어주었습니다. 매워서 우유를 더 마시면서도 맛있다고 먹기 바쁩니다. 숙주, 청경채, 단호박, 햄, 중국 당면, 팽이버섯, 어묵, 맛살, 연근 등 다양한 재료가 들었지만 좋아하는 것만 골라먹습니다. 우유로 배를 채운 건지, 마라탕으로 채운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릇에 남은 걸 보니 이래도 되나 싶습니다. 이것밖에 먹지 않을 거면서 왜 마라탕이 좋다고 하지? 마라탕이 왜 좋을까?

간발의 차이로 도착한 큰딸에게도 덜어놓은 마라탕으로 밥상을 차려줬습니다. 둘째보다는 마라탕에 진심인 큰딸입니다. 여러 번 먹어봐서 취향도 제법 뚜렷합니다. 야채, 중국 당면, 햄, 떡 정도만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배가 부르다며 일어났고, 남긴 음식을 보니 둘째와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정말 마라탕을 좋아하는 것 맞나? 


오늘처럼 반찬이 없을 땐 제일 먼저 마라탕을 외치는 두 딸에게 그걸 왜 먹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저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의견을 내봅니다. 서로 의견을 내면서 한 가지로 좁혀가면 만족스러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서로 먹고 싶은 것만 주장하면 둘 다 먹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시간만 보내고 마음만 상해 결국 있는 반찬으로 대충 때우게 되더라고요. 그러느니 어느 한쪽이 양보하면 그나마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마라탕을 싫어하는 건 저의 취향일 뿐입니다. 제가 싫다고 아이들까지 못 먹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걸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도 있습니다. 아이들도 제가 먹고 싶은 걸 말할 때면 알아서 양보해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의견을 좁히며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취향을 아는 것과 양보는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양보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는 건 자신이 양보받았을 때인 것 같습니다. 만약 매번 제가 먹고 싶은 것만 주장하고 따르라고 했다면 아이들은 양보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를 겁니다. 반대로 제가 양보하면서 두 딸의 의견이 받아들여진다면 아이들은 양보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타인의 입장이 되었을 때 배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배려의 행동은 공감이 없다면 나올 수 없으니 말입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취향은 있기 마련입니다. 한 끼 식사를 제대로 먹고 싶은 게 사람 본능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먹을 수도 없습니다. 혼자 산다면 얼마든 가능할 테지만요. 가족으로 사는 동안은 배려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을 겁니다. 배려를 통해 내가 원하는 걸 얻기도 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걸 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꼭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배려는 내가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요. 먼저 주면 더 크게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먼저 준다는 걸 바꿔 말하면 상대방이 원하는 걸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배려일 테고요. 그러고 나면 나도 상대방의 배려로 더 크게 돌려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도 마라탕이 좋아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까지 못 먹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 자주는 못 사줘도 먹고 싶다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사줘야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2022. 11. 19.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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