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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an 13. 2023

비가 와서 다행이다

2023. 01. 13. 07:35


사무실로 가는 5분 남짓 동안 바지와 신발이 젖었다. 운전하는 내내 와이퍼 팔이 빠질 만큼 닦아냈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 겨울에 장대비다. 겨울 내 폭설로 도로가 마비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맨 몸으로 맞으면 아플 것 같은 굵기의 빗방울이 내리는 건 흔치 않은 것 같다. 나는 눈보다 비가 낫다고 생각한다. 같은 양의 눈이 새벽부터 왔다면 옴짝달싹 못했을 것 같다. 바지와 신발은 젖어도 출근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비 내린 아침이 달갑지 않은 건 아마도 아이들이 아닐까 싶다. 겨울엔 눈이 오는 게 당연하다 여길 테니 말이다. 나도 철이 들기 전까지는 눈이면 환장을 했었던 것 같다. 젖은 옷 빨 어머니의 수고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눈이 보이면 무작정 달려들었다. 뒹굴다시피 한 나절 놀고 나면 옷도 만신창이다. 그때는 동네 언덕은 스키장이었다. 맨땅이 안 보일정도만 쌓여도 비료포대, 미리 만들어놓은 썰매를 타며 눈길을 더 반질하게 만들었다. 운동장에 쌓인 눈은 손발이 가는 대로 굴리다 보면 어느새 내 몸보다 더 큰 눈사람이 만들어졌다. 눈싸움은 각개전투를 방불케 했다. 한 방이라도 더 맞히고, 덜 맞기 위해 은폐 엄폐는 기본이다. 최후의 일격을 위해 온 힘을 그러모아 꿀꿀 누르고 누른 주먹만 한 눈 알 한방을 준비한다. 감정을 실어 던지는 건 아니지만, 잘못 맞으면 쌍코피에 절교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때는 어른들이 눈 치우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출근길이 불편할 거란 짐작도 못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눈이 녹기 전에 있는 힘껏 노는 게 눈에 대한 예의라 여겼다.


비를 반기는 사람은 일부일 테다. 가뭄일 때 내리는 비에 많은 이들이 안도한다. 딱 필요한 만큼만 오면 더없이 좋다. 지나치면 언제나 화를 부르는 법이다. 비로 인해 피해를 입는 건 한 해 두 해 일이 아니다. 중학교 때 살던 동네가 이틀 동안 내린 비로 건물 1층 높이만큼 잠긴 적 있었다. 다행히 2층에 살던 우리는 밖을 나가지 못하는 불편만 겪었다. 물에 잠긴 집에 비하면 우리는 지하에 설치된 보일러를 고치는 데 꽤 많은 대가를 지불한 게 전부였다. 누구도 그날 내린 비에 집이 잠길거라 예상 못했다. 뉴스에서 한강이 범람할 수도 있다는 속, 보를 연이어 보도했다. 태풍으로 입는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비에 잠기는 것 또한 무시무시했다. 생각해 보면 비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다. 비를 핑계 삼아 낮술을 즐기거나, 카페 한쪽에서 내리는 비를 보며 분위기 잡는 이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또 출퇴근길 여러 번 환승하는 사람,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배달을 업으로 삼은 사람 등도 있을 테다. 


한 겨울에 눈 대신 내린 비를 반기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비대신 눈이 오길 바라는 이도 있다. 아니면 비든 눈이든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언제 만나도 반가운 사람이 있다. 언제든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저마다 주변에는 필요할 때 망설이지 않고 달려와주는 사람이 있고, 나를 필요해 제일 먼저 찾아주는 사람도 있다. 언제 봐도 좋은 사람은 언제 내려도 환영받는 눈 비 같은 사람일 테다. 언제나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눈치 없이 때를 못 맞춰 내리는 눈 비 같은 사람이다. 나는 이 중 어떤 사람일까? 우산을 써도 바지가 젖을 만큼 짜증을 유발하는 비 같은 존재일까? 눈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을 만큼 알맞게 내리는 눈 같은 사람일까? 


상대방에게 어떤 사람이 될지는 나 하기 나름인 것 같다. 하늘에서 눈이 올지 비가 올진 자연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달라진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쉽지 않다. 또 모두와 등지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제 때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모든 요청에 'YES'하지 않고 자기중심을 잡는 사람, 내가 조금 손해를 봐도 기꺼이 나서는 사람, 가진 게 무엇이든 나누고 보는 사람, 상대방의 눈치를 읽을 줄 아는 사람. 상황과 사람에 따라 요구되는 모습은 제각각일 수 있다. 그래도 적어도 자기중심을 잡고 산다면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 아침 내린 비가 눈이 아니어서 다행인 것처럼. 


2023. 01. 1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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