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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an 18. 2023

약도 없는 병, 극복 중입니다

2023. 01. 18.  07:41


마흔여덟, 지금껏 고치지 못한 병이 하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거의 모든 순간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에게 피해 주기도 합니다. 고쳐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습니다. 어느 병원을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주변 사람 열에 아홉은 같은 병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같은 병을 가진 여럿이 모이면 대환장 파티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같은 병을 가진 옆 사람을 두고 보면 저 또한 답답해 미칠 지경입니다. 그러니 나를 보는 상대방도 같은 심정일 테고요. 주변에 극복한 사례자를 수소문해 방법을 들어보기도 하고, 용하다는 책을 사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극복한 사람은 담배 끊는 것 못지않게 독한 사람입니다. 살면서 한 번은 독해져야 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병을 극복하는 게 독해져야 할 그 한 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월요일 피로가 덜 가셨는지 저녁밥을 시켜 먹자고 아내가 말합니다. 아내 보다 먼저 퇴근해 밥을 해놓긴 했지만 저도 배달해 먹자는 데 동의했습니다. 떡볶이가 먹고 싶답니다. 먹고 싶은 걸로 시키라고 했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그 사이 큰딸이 학원에서 돌아왔습니다. 떡볶이를 먹는다니 물개 박수를 칩니다. 모녀가 머리를 맞대고 배달앱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두 딸이 점심에 먹은 보온 도시락을 씻었습니다. 고무장갑을 벗고 식탁에 앉았는데 여전히 배달앱 화면에 눈이 가 있습니다. 먹음직스러운 사진을 보니 더 정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제 눈을 보탰습니다. 배가 고프니 다 먹고 싶은데 정작 결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도 저도요.


안 되겠다 싶어 작정했습니다. 사진에 눈길 주지 말고 먹고 싶은 것만 생각하기로 합니다. 의견을 듣기보다 먼저 제안합니다. 이것저것 그리고 요것. 제가 추천하는 대로 결정했고 장바구니에 담은 뒤 결제했습니다. 저녁 메뉴 결정하는 데 30분 걸렸습니다. 이 정도면 선방입니다. 혼자 배달음식 시킬 땐 이보다 더 합니다. 배달앱  모든 카테고리를 한 번 이상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 같습니다. 정독 수준입니다. 중요한 건 그렇게 봐도 결정을 못한다는 겁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이미 마음에는 먹고 싶은 메뉴가 있는 채로 배달앱을 켜는 게 대부분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신가요? 치킨이 먹고 싶은 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달앱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시간만 죽이는 겁니다. 한참을 방황하다가 결국엔 처음 생각했던 그 브랜드 그 메뉴를 주문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만 이러지 않는다고 소심하게 확신합니다.  


어떤 병인지 눈치채셨나요? 현대인의 만성병, 결정장애입니다. 우유부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유부단 셋 만 모여도 주문하는 데 한 나절입니다. 식당 자리에 일찍 앉아도 음식은 제일 늦게 나오는 불상사가 일상 다반사입니다. 핸들은 잡았지만 갈 곳을 정해지 못해 같은 곳을 몇 바퀴째 도는 돌아버리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바지 한 벌 사는 것도,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예외 없습니다. 꽤 많은 사람이 같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저마다 고치고 싶어 합니다. 당당하게 자기 의견 말하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결정장애를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정' 하는 겁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결정을 못해서 결정장애가 생깁니다. 반대로 결정을 잘하면 생기지 않는 병입니다. 물론 결정이 쉽다면 이런 병도 안 생길 겁니다.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건 아마 결정에 대한 결과를 걱정해서 인 것 같습니다. 자장면도 먹고 싶고 짬뽕도 먹고 싶고, 부산도 가고 싶고 제주도도 가고 싶은 마음.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후회가 남습니다. 해보지 않고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미련입니다. 한꺼번에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게 인간이지요. 그래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결정 후에는 미련을 버리는 겁니다. 어차피 또 선택의 순간은 오기 마련입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하면 됩니다. 지금은 지금 하고 싶은 걸 선택하면 그만입니다. 연습이 필요합니다. 선택에 확신을 갖고 선택하지 않는 것에 후회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연습하다 보면 결정하는 시간도 줄어들 겁니다. 저도 같은 방법을 연습 중입니다. 물론 큰돈이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예외입니다.


결정이 쉬워지면 삶에도 속도가 붙고 만족도도 높아질 거로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안 빼앗기고 그렇게 남은 에너지를 더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요. 2년째 직장에서 먹는 점심 메뉴가 정해져 있습니다. 탄단지 샐러드 한 그릇입니다. 점심 메뉴 고민 안 한지 2년째라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저는 남는 시간에 책 읽고 글 쓰고 몸을 움직이는 데 활용했습니다. 보다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처럼 극단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의식적으로 접근해봤으면 합니다. 연습을 통해 조금씩 시간을 줄여보는 겁니다. 그렇게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에게 사용하는 겁니다. 분명 이전보다 일상에 만족도가 높아질 거로 믿습니다. 단점을 고치기 위해 한 번쯤 미쳐야 한다면 빠를수록 좋지 않을까요? 선택은 여러분 몫입니다.


2023. 01. 1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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