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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an 20. 2023

죽음이 남긴 의미

2023. 01. 20.  07:35


밤사이 내린 눈이 얼어서 도로 가장자리가 빙판이 되었다. 빙판길에 미끄러졌는지 가로수를 들이받은 승용차가 보인다. 사고 난 차를 싣고 갈 견인차가 인도에서 끌어내리는 중이다. 앞차 사정을 알리 없는 뒷 차의 긴 줄인 답답해 보인다. 사고 난 차 주인은 이런 사고가 일어날 줄 알았을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늘 다니던 길이었고 도로 곳곳에 얼음을 봤을 테다. 하지만 자신이 운전하는 차가 빙판에 미끄러질 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고가 일어나는 건 한 순간이다. 찰나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되고 만다. 자신의 잘못일 수도, 의지와 상관없는 사고일 수 있다. 어떤 이유이든 한 번 일어난 사고는 되돌릴 수 없다. 죽음도 그런 것 같다. 의지가 작용하는 죽음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죽음도 있다. 죽는 순간을 아는 죽음이 있다면, 예상하지 못한 순간 마주하기도 한다. 어떤 이유이든 한 번 맞이한 죽음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큰형의 죽음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일어났다. 정작 본인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짐작은 했지만 가족에게 알릴 건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다. 그러다 혼자 있는 동안 지병이 원인으로 짐작되는 통증에 입으로 뿜어져 나오는 피를 감당 못하고 홀로 죽음을 맞은 것 같다. 우리에게는 멀쩡해 보이는 육신만 남았다. 그때 처음 내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다. 깨끗한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없었다. 얼굴을 감싸 쥐어도 온기가 없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내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그때는 울어주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가 울고 있고 후회하고 있고 그리워한다는 걸 형은 알리 없었다. 죽음은 단지 영원한 헤어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4년이 지났지만 어머니가 느끼는 슬픔만큼은 아닌 것 같다. 슬픔대신 미안함과 아쉬움이 자리 잡았다. 


김창옥 TV에서 사연 하나를 들었다.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8일 째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눈물이 나지만 억지로 참아내고 있단다. 이유를 물으니 동생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이 견뎌야 동생도 함께 버텨낼 거라면서. 김창옥 강사는 지금은 눈물을 흘려야 할 때라고 했다. 자기 안의 감정을 감춰두면 더 큰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고 더 힘들 수도 있단다. 그러니 이별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마음껏 표현하는 게 건강하게 이별하는 자세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이별하는 게 돌아가신 어머니도 바랄 거라면서. 당신의 죽음이 자식에게 더 큰 아픔으로 남기보다, 이별을 받아들이고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어제와 같은 일상을 살길 바라는 게 부모 마음이지 않겠냐며.


의미 없는 죽음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어떤 의미로 남을지는 저마다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 같다. 건강을 잃은 형을 마음 한편에서 원망했었다. 어머니는 오직 큰형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집에서 365일 수발을 들었다. 그런 정성에도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형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는 똑같지 안 살겠다고 다짐했다. 내 가족을 지키고 어머니가 덜 걱정시키는 게 내 역할이리라. 형도 건강이 나빠지는 자신을 자책했을 것 같다. 후회도 불안도 두려워도 했을 테다. 살아서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 같다. 너는 다른 삶을 살라고. 살아 마주 앉아 전해 들었다면 아마 잔소리로 흘렸을 수 있다. 그때는 귀담아들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건강이 나빠지고 기어이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난 형을 보며 그제야 다른 삶을 다짐했다. 식단관리와 금주, 어쩌면 형의 죽음에서 영향받은 것 같다. 형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새기면 내 건강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내가 찾은 죽음의 의미는 건강은 잃기 전에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형도 작은형과 내가 더 건강하게 살길 바랄 테니 말이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연자, 고통 속에서 먼저 삶을 마감한 큰형, 또 다른 어떤 죽음도 그들의 생전 모습을 통해 애도의 크기가 정해지는 것 같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데 양으로 비유하는 게 난센스 일 수 있다. 그래도 굳이 비유를 하는 의미는 숨 쉬는 동안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이다. 같은 영상에서 김창옥 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주변 사람이 더 오래 더 깊이 슬퍼해주길 바란다고. 빈자리의 크기만큼 잘 살았다는 방증이라고. 맞는 말 같다. 우리는 살면서 받는 평가도 필요하지만 죽음 뒤 기억될 모습도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해 봤다. 삶을 잘 살아낸 사람은 죽었다는 사실 자체로 의미를 남긴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 그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그 자체로 우리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행위라 생각한다. 아무에게나 그런 마음을 갖게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더 오래 더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는 삶도 의미 있다. 반대로 내 주변에만 기억되는 삶도 의미의 크기는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큰 가치도 그 시작은 자기 주변에서 시작됐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멀리 보기보다 발 밑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더 많이 대화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감사하면서 말이다.  내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면 남겨진 이들에게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을 테다.  


2023. 01. 2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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