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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an 16. 2023

하루저녁 설거지 두 번

2023. 01. 16. 21:13


한두 번 아니었다. 이쯤 되면 상습범이다. 귀가 두 개인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는 흘려보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아마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잔소리를 덜해서 그런가 보다. 아내는 수업 때문에 퇴근 후 학교에 갔다. 한 시간 일찍 퇴근해 6시쯤 현관문을 열었다. 짐작이 안 맞길 바랐지만 비켜가지 않았다. 거실부터 식탁, 싱크대로 이어지는 동선은 지뢰밭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밥상머리 잔소리 한 발 쏠 각오로 1차 설거지를 시작한다.


방학인 두 딸의 점심은 아내가 챙겨놓고 출근한다. 보온 도시락에 밥, 국, 반찬을 담아두면 밥때가 되면 차려먹는 게 그들의 몫이다. 둘이 마주 앉아 도시락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왠지 짠하다. 그래서 먹고 난 걸 반드시 치우라고 잔소리를 못하겠다. 그나마 요즘은 나아졌다. 먹고 난 빈 그릇은 싱크대에 담가둔다. 무슨 미련이 남는지 꼭 한두 개는 식탁 위를 뒹군다. 도시락만 있으면 봐줄 만하다. 어디서 구해오는지 각종 과자며 젤리 봉지가 식탁 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먹고 난 빈 그릇은 설거지를 위해 물에 담가두라고 말했다. 빈 그릇 네댓 개도 물이 든 것, 물이 반 만 찬 것, 바짝 말라붙은 것까지. 수도꼭지 한 번 트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침과 점심으로 먹고 난 빈 그릇을 씻어야 저녁밥을 담아줄 수 있다. 종아리 둘레만 한 보온 도시락은 작아도 속이 꽉 찼다. 밥, 국, 반찬통에 뚜껑까지 4단 분리다. 모조리 씻고 나니 얼레벌레 20분 걸렸다. 식탁 주변과 거실 바닥에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청소기로 쓸어 담는다. 다 마른빨래는 개서 각자 옷장으로 보낸다. 설거지, 청소기, 빨래까지 한 시간 꼬박이다. 밥과 반찬은 준비되었다. 아내는 출근 준비로 바빴을 텐데 국까지 끓여놨다. 큰딸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고기만 구워내며 된다. 기다리는 동안 아침에 쓰다만 글을 꺼냈다. 영 감이 오지 않는다. 쓰던 건 다시 넣어두고 새 글을 써야겠다. 시작이 매끄럽지 못하면 항상 중간에 멈춘다. 그렇게 어둠에 갇힌 글이 20여 편이다. 언제 다시 빛을 볼 지 모르겠다.


큰딸은 재시험에 안 걸려 제때 도착했다. 들어오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반찬을 꺼내놨고 고기를 구웠다. 방에 들어간 사이 밥과 국을 담아냈다. 셋이 둘러앉았다. 둘 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밥도 잘 먹는다. 거기다 대고 먹고 난 빈 그릇은 물에 담가두고, 빈 봉지는 쓰레기통에, 과자 부스러기는 흘리지 말고, 가방은 한 곳에, 양말은 빨래통에, 식탁은 행주로 닦으라고 속으로 말했다. 해맑은 표정을 보니 잔소리가 웬 말인가 싶다. 셋이 오랜만에 화기애애하게 식사했다. 이 기분을 몰아 기꺼이 2차 설거지까지 했다.


 중2가 되고 초4가 된다. 서서히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듯하다. 올 한 해 동안 얼마나 치열할지 두고 볼 일이다. 아직까지는 둘 다 큰 반항 없이 송충이 기듯 부드럽게 넘어가는 중이다. 그러다 언제 어느 순간 돌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늘 마음으로 대비하고 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중이다. 플랜 A부터 Z까지 준비하면 좋으련만 A에서 막힐까 심히 걱정이다. 두 딸의 감정을 내가 받아내지 못하는 말 그대로 전쟁이다. 아빠는 중립국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 스파링 상대는 엄마다. 둘 다 지치고 힘들 때 나에게 기댈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요즘 운동 덕분에 어깨도 태평양이다. 얼마든 두 딸과 아내를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셋이 한꺼번에는 버겁지만 따로따로는 얼마든 가능하다. 


이 글을 쓸 수 있어서 감사하다. 두 딸과 아직은 마주 보며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각자의 뜻에 따라주기보다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사춘기 감정이 미친$ 널뛰어도 지킬 건 지켰으면 좋겠다. 가족끼리 최소한의 존중을 지키면 감정도 덜 상할 거로 믿는다. 두 딸이 알아서 해주길 바라지 말고, 나와 아내의 태도에서 배울 수 있길 바라본다. 아내와 나도 딸에게 본이 되는 부모이고 싶다. 그렇게 둥글둥글 서로 맞물려 굴러가고 싶다. 둥글면 누구도 찔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2023. 01. 16.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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