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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an 02. 2023

미역국이 나를 살렸다

  2023. 01. 02.  06:13


니체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인간이다. 그래서 나도 망각했다. 

새해 첫날, 달라진 건 없었다. 평소 주말과 다르지 않다. 일요일 아침도 정해진 시간 일어나 10분 동안 글을 쓰고 맥도날드에 가기로 했다. 작은 방에서 옷을 챙겨 입고 나오는데 거실에서 자다가 깬 아내와 마주쳤다. 안방으로 들어가며 한 마디 던진다. "새해 첫날부터 나가려고?" 당연한 듯 대답했다. "일요일이잖아, 하던 거 하는 거지 뭐." 그러고는 집을 나섰다. 고민을 잠깐 했다. 첫날부터 나가는 게 맞을까? 한편으로 첫날이라고 안 하면 다음 날은? 달력 숫자만 바뀌었을 뿐 일상이 달라져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의 말을 곱씹어봐도 새해 첫날부터 내 할 일 하는 게 맞는 거라 믿었다. 


6시, 맥도날에는 밤새 유흥을 즐긴 걸로 보이는 20대 몇 무리가 벌써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2층으로 올라갔다. 즐겨 앉는 자리에 노트북을 켰다. 퇴고를 시작으로 블로그와 브런치에 올릴 글을 썼다. 3시간 가까이 한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 새해 첫 끼를 해결하러 온 사람으로 빈자리가 없었다. 매장을 빠져나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대로 운동하러 가는 게 다음 일정이다. 또다시 아내가 던진 한 마디가 떠오른다. 이쯤 하고 집으로 갈까? 아니다. 이왕 나온 건 할 건 하고 돌아가자. 헬스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기 전에 또 한 번 아내의 말이 생각난다. '왜 이리 찜찜하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아이들 깨면 아침 차려주는 건 아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이 불안함은 뭐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래도 운동하러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폼롤러로 스트레칭을 했다. 그 사이 아내에게 카톡이 와 있다. '언제 올 거야?' 일요일 아침에 이런 문자 보내는 아내가 아니다. 분명 무언가 있다.


전화를 걸었다. 늦게 받는다. 언제 올 거냐고 물어서 운동 다하고 나면 11시쯤 된다고 대답했다. 알았다며 끊는다. 그래도 여전히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다. 카톡이 울린다. '채윤이 데리고 병원 가려고.' 그제야 그 찜찜함이 무엇인지 알았다. 밤 사이 둘째는 열 때문에 잠을 설쳤다. 사놓은 해열제는 별 효과가 없었다. 1월 1일이 생일이고, 낮에 친구와 키즈카페를 가기로 되어 있었다. 몸상태 확인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운동할 상황이 아니었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갔다.


아내는 둘째를 데리고 벌써 병원으로 출발했다. 나는 집으로 바로 갔다. 겉옷을 걸어두고 주방으로 가니 물에 불려놓은 미역과 핏물을 빼려고 담가둔 고기가 보인다. 그랬구나. 둘째 생일상도 차려야 하는 데 병원까지 데리고 가야 하니 내가 언제 올지 물어봤던 거였다. 이걸 까먹고 있어서 계속 찜찜했던 거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한 번에 10인분을 끓일 수 있는 크기의 냄비를 꺼냈다. 핏물을 뺀 고기를 두어 번 더 씻었다. 종이타월로 물기를 제거하고 달궈진 냄비에 넣었다. 들기름이 안 보여 참기름으로 고기를 볶았다. 고기가 볶는 동안 불려놓은 미역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물로 한 번 더 헹궈냈다. 노릇하게 볶아진 고기 위에 미역을 넣고 조금 더 볶다가 물을 부었다. 물은 절반만 채웠다. 액젓으로 간을 하고 맛을 낸다. 아내가 야심 차게 구매한 꽃게 액젓을 넣고 맛을 봤다. 어딘가 부족하다. 다시 참치 액젓과 연두, 동전 모양 국물 전용 수프도 넣었다. 그제야 맛이 돌아온다. 이제부터 끓일수록 맛이 우러나게 된다. 미역국은 옆 화구로 자리를 옮기고 해동된 고등어를 프라이팬에 올렸다. 고등어와 미역국이 끓는 동안 냉장고 반찬을 접시에 옮겨 담아 식탁 위에 올린다. 아내와 둘째가 돌아오면 밥과 국, 고등어를 담아내면 된다. 


첫날부터 병원에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단다. 열이 난다니 코로나와 독감 검사를 같이 받아서 시간이 더 걸렸다. 덕분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사이 둘째 생일 밥상을 제대로 차렸다. 망각을 만회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혼자 생각했다. 밥상을 차려놓아서 인지 아내는 별 말 없었다. 나도 생색내지 않았다. 생색낼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 없이 운동하고 온 내게 돌아올 아내의 반응에 아찔해진다. 다행히 미역국도 아내와 아이들 입맛에 맞았다. 찰나의 선택으로 누구 한 명 얼굴 붉히지 않고 넘어간 둘째 생일 아침이었다. 


중요한 순간 누구나 깜빡할 수 있다. 깜빡한다는 건 말 그대로 기억을 못 하는 거다. 대개는 의도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문제는 다시 기억났을 때 대처인 것 같다. 눈치가 없지 않은 덕분에 바지런히 국을 끓이고 생선을 구워냈다. 나처럼 실수를 인정하고 수습하면 만회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불려놓은 미역을 보고도 아무것도 안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싫다. 실수도 인정 안 하고 눈치마저 없다면 상대방의 화만 키울 뿐이다. 눈치껏 끓인 미역국이 새해 첫날 깜빡했던 나를 살렸다.        

       

2023. 01. 0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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