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준 Jan 22. 2023

거품이 사라지기 전에

2023. 01. 22.  06:29


평소 주말이면 맥도널드에서 글을 쓰고 있을 시간입니다. 같은 시간 어제오늘 집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맥도널드 아메리카노 대신 네스카페 버츄오로 내린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요. 매장에서 파는 아메리카노와 가장 큰 차이는 '크레마'라고 부르는 황갈색의 두꺼운 거품층입니다. 광고에서도 특히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거품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움을 경험해 보라고 소비자를 유혹합니다. 저도 그 말에 혹해 생일 선물로 받은 상품권에 현금을 더해 샀습니다. 2년째 잘 사용 중입니다. 다양한 소비자 입맛에 맞추기 위해 캡슐도 각양각색입니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230ml 용량의 멜로지오를 가장 좋아합니다. 전용잔에 내린 두툼한 거품층은 마시는 내내 향을 지켜주고 온도를 유지시켜 주고 커피 맛을 더 부드럽게 즐길 수 있게 돕습니다.


4년째 혼자 사는 어머님이 얼마 전 독거노인 신청을 했습니다. 쌀과 반찬, 복지관 이용 출입증과 매주 안부 전화가 온다고 좋아하십니다. 이런 혜택이 있는지 몰랐답니다. 낯선 곳으로 이사 온 뒤 이웃이 늘면서 이런 정보도 얻는다고 하십니다. 아들이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할 따름입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어머니는 스스로 하셔야 직성이 풀리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남의 말 잘 안 듣는 분입니다. 괜히 나섰다가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원망만 돌아옵니다. 그래서 많이 다투기도 했습니다. 제 딴에는 덜 부딪히려고 눈치 보는 겁니다. 원하지도 않는데 해보라고 하면 역정부터 내시니 말입니다. 짐작건대 독거노인 신청도 먼저 말을 꺼냈으면 손사래 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종의 자존심 같습니다. 아직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요.   


명절 음식 준비하러 가는 날입니다. 일부러 늦장 부렸습니다. 만들 음식도 많지 않으니 느긋하게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몸도 안 좋으니 자식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는 데 아니었습니다. 이미 절반 이상 해놨습니다. 평생 빨리빨리를 몸에 달고 산 분입니다. 나이 먹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팔다리 관절이 성치도 않으면서 기어이 혼자 하십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요. 지금껏 잔소리, 협박, 부탁도 해봤지만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 성격대로 하게 두는 게 그나마 덜 부딪치는 거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무 말 안 했습니다. 그저 만들어 놓은 음식 맛있게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복지관에서 받은 5킬로그램 쌀과 어묵바를 챙겨주십니다. 줄게 없다면서요.


갓 내린 거품은 쫀쫀한 생크림처럼 탄력 있어 보입니다. 입술에 닿는 맛도 그렇고요. 첫 모금에 잔을 기울여 거품을 뚫고 나오는 커피는 향과 맛이 가장 진합니다. 두 모금 세 모금 마시다 보면 서서히 식어갑니다. 틈이 안 보일만큼 쫀쫀하던 거품도 기포가 듬성듬성 생깁니다. 거칠어진다고 할까요. 그래도 한 잔을 다 마시는 동안 거품이 먼저 사라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양은 변해도 끝까지 남아 향과 온도를 지켜줍니다. 마치 어머니의 마음처럼요.


2023. 01. 22. 07:43

매거진의 이전글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