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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03. 2023

대구 찹쌀도넛 콩국

2023. 02. 03.  16:20


복합기를 사무실에 설치하는 걸로 출장을 마무리했다. 기차 시간까지 5시간 남았다.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동대구역으로 말했다. 어디서 남은 시간을 때우지? 기차 타기 전 저녁을 먹어야 하나? 저녁밥으로 무얼 먹지? 빵이나 먹을까? 빵? 찹쌀도넛, 놀면 뭐 하니, 대구, 그래 여기까지 온 김에 찹쌀도넛 콩국 사가야겠다. 유재석 씨의 먹는 모습은 그게 무엇이든 먹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얼마 전 찹쌀도넛 콩국도 그랬다. 옆에서 함께 보던 두 딸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먹고 싶다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택시 기사에게 명덕역으로 가 달라고 말했다. 대로변에 위치해 쉽게 찾았다. TV에 소개된 것치곤 가게 주변이 한산하다. 가까이 가니 출입문에 재료 소진으로 4시 반에 다시 문을 연다고 적혀있다.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아내와 두 딸이 먹고 싶어 하니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


오늘 세 잔 째 아메리카노를 시켜 자리에 앉았다. 퇴고를 마친 원고 검토를 위해 이은대 작가에게 보냈다. 늘 이 순간은 떨린다.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평가받는 시간이다. 일말의 인정도 없다. 그래서 더 값진 시간이다. 회신을 기다리기로 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시계가 4시 반을 가리켰다. 가방을 챙겨 다시 세연콩국으로 갔다. 여전히 가게 밖에 사람이 없다. 아싸! 좋다고 출입문을 열었다. 좋다 말았다. 이미 20여 명 남짓 줄 서있다. 분명 4시 반에 문을 연다고 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줄을 보니 괜히 조바심이 난다. 못 살 일은 없겠지. 포스기 고장으로 주문을 받지 않는다. 직원끼리 속닥이더니 현금과 계좌이체로 지불해 달란다. 그제야 주문을 받고 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매장에서 먹는 사람, 포장해 가는 사람, 내 순서가 오기까지 30분 걸렸다. 기다리는 동안 몇 인분을 살 지 고민했다. 2인분은 적을까? 4인분은 많겠지? 모자란 듯 3인분 사자.  


하얀 봉지 안에 찹쌀도넛이 든 종이 그릇 세 개와 콩국물 세 팩이 담겼다. 사람이 붐비는 기차역 안을 봉지를  달랑거리며 걷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다. 솔직히 그 상상 때문에 살까 말까 망설였다. 봉지를 들고 다니는 내 모습이 창피할 것 같았다.(쇼핑백에 담겼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한다니 쯧쯧. 그랬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있다. 음식점을 가도 쇼핑을 해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도 타인의 눈을 의식한다. 그들은 전혀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다. 낯선 이들과 마주할 일이라도 생기면 괜히 의식해 행동이 어색해지고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고 심하면 식은땀을 흘리기도 한다.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관심 갖는 이들이 없는데도 그렇다.  


손에 든 이상 집까지 가져가야 한다.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이다. TV에서 본 음식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맛보는 색다른 경험. 대구로 출장 갔는데 빈 손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표현하지 않겠지만, 약간은 서운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 냈다. 나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음식이 담긴 봉지를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 릴스에 올렸다. 올리자마자 큰딸이 보고 하트를 남겼다. '네가 나에게 용기를 주는구나.'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대구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신세계 백화점 8층 공용 공간까지 들고 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하얀 봉지는 노트북 화면 너머 당당하게 자리해 있다. 내 주변을 오가는 이들이 보든 말든 말이다.


어쩌면 봉지 안에 쓰레기가 들었다면 더 창피했을 수 있다. 아니 들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내 손에 들린 봉지 안에는 가족에게 먹일 음식이 담겨 있다. 맛은 둘째치고 궁금했던 음식을 맛보는 경험이 더 값진 것 같다. 그 경험을 위해 내 한 몸 기꺼이 희생(?)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두 딸과 아내가 이런 아빠의 수고에 감사해한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다. 당연히 그래주겠지.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그나저나 가는 동안 객실 안에 있어도 상하지 않겠지?  


2023. 02. 0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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