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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04. 2023

어쩌다 혼자

2023. 02. 04.  14:00


어쩌다 보니 주말 오후 혼자되었다. 아내는 파마하러 미용실로, 두 딸은 친구 만나러 갔다. 약속도, 머리를 손질할 일도 없는 나만 집을 지킨다. 아내가 지시한 빨래가 끝난 옷은 베란다에 널었다. 오늘따라 볕도 잘 든다. 기온도 제법 올라 겨울날 치고는 빨래가 잘 마를 것 같다. 한파가 몰아쳐도 빨래할 옷은 수시로 나왔다. 세탁기가 얼지 않는 날을 골라 빨래를 돌렸다. 베란다에 널면 젖은 옷이 얼 것 같아서 거실로 건조대를 옮겨놨다. 건조기가 없는 게 아쉽다. 실내 건조 시 세탁 세제 중 특정 성분이 사람에게 해롭다는 기사를 봤다. 그래서 요즘은 실내 건조용 세제가 따로 나온다. 아마도 해로운 성분이 안 들어간, 아니 덜 들어간 세제이지 싶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니 믿고 사용하는 수밖에. 저마다 옷과 수건은 제 역할을 하기 위해 다 마를 때까지 거실에서 베란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다. 집 나간, 아니 잠깐 자리를 비운 가족을 기다리는 나처럼.


두 딸이 어릴 때라고 해봐야 불과 2~3년 전이다. 한참 책 읽고 글쓰기 빠져있을 때다. 여전히 빠져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주말에 내 시간을 따로 만들고 싶었다. 이른 새벽 2~3시간 도 모자랐다. 코로나가 한참이어서 외출할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었다. 두 딸 나름 집에 있는 시간을 즐겼다. 물론 밖에서 무언가 하는 게 더 좋기는 했지만. 그러지 못하니 그저 상황에 맞게 적응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런 아이들과 달리 나는 해야 할 일을 위해 집 밖을 나가고 싶어 했다. 집에 있으면 집중이 안 된다는 핑계로 말이다. 아내도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러려니 하고 허락해 줬다. 적게는 2시간, 많으면 4시간 혼자 있었다. 자유를 즐긴다기보다 자기 계발을 위해서였다. 밖에 있는 시간이 쌓인 덕분에 나는 조금씩 성장했다. 밖에 있는 시간이 쌓였기 때문에 아이들과 아내는 나와 있는 시간이 줄었다. 잃어버린 시간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한다. 물론 내 선택이 먼저였고, 또 다른 핑계를 대자면 코로나 때문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요즘 들어 주말이면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고 있다. 오늘처럼 말이다. 아내는 수업이나 약속을 잡고, 큰딸은 학원에 갔다 친구를 만나고, 둘째는 아이돌을 꿈꾸며 고정 멤버와 정기적으로 춤연습을 한다. 나도 주말을 이용해 수업을 듣거나 사람을 만나면 자연히 나가겠지만 요즘은 외부 활동이 줄어든 시기이다. 아마 더 활발하게 움직이기 위해 잠시 뜸 들이는 시기이지 싶다. 약속만 잡지 않으면 주말 오후는 굳이 집을 나가지 않아도 혼자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헤드폰을 쓰고 자판을 두드리면 카페가 아니어도 집중이 잘 된다. 카페, 집 저마다 장단점이 있다. 오가는 사람 구경하며 생각을 환기시킬 수 있는 카페, 위층 꼬마가 뛰지만 않으면 얼마든 집중이 가능한 조용한 집. 5년째 카페를 찾아다니며 책 읽고 글 쓰다 보니 그곳의 백색 소음에 익숙하다. 때로는 그 소음이 집중력을 높여주는 데 그만이다. 반대로 집은 백색소음이라고 해봐야 윗집이 만들어내는 층간 소음이 전부다. 그러니 집을 나가 카페를 전전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중2, 초4 두 딸은 앞으로 더 자주 집을 나갈 것 같다.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더 즐거울 테니 말이다. 집을 나서는 시간도 빨라지고 돌아오는 시간도 늦어질 것이다. 아내와 나는 그런 아이들이 별 일 없이 돌아오길 속으로 애태우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애가 탈거다. 내 눈에 우주 최강 미모를 가진 두 딸이니 말이다. 저마다 인생을 살기 위해 밖으로 밖으로 다닐 것이다. 할 일이 줄어드는 아내와 나는 우리의 인생을 살기 위해 안으로 안으로 돌아올 것 같다. 집을 비운 두 딸이 돌아오는 시간이 언제인지 시계만 바라보면서.


나도 그랬다. 친구가 좋을 땐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 생각을 안 했다. 늦게 들어온다고 혼이 나면 왜 혼내냐고 따지기나 했다. 같이 있지 못해 아쉬운 당신들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아마 헤아렸다면 철이 들었다는 의미이다. 여전히 철들지 않아서 혼자 지내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가 보다. 갱년기인가, 주책이다, 글씨가 번진다. 콧물도.


초등학교 때 고양이를 키운 적 있다. 새끼 때부터 하루 세끼 먹이며 끼고 살았다. 몇 해 함께 살던 이놈도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된 건지 집에 돌아오는 시간과 횟수 줄었다. 세끼 밥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는지 어느 날부터 집에 오지 않았다. 찾지 않았다. 어차피 떠날 놈이었다. 떠돌던 녀석을 데려와 키웠으니까. 우리가 낳은 두 딸도 때가 되면 엄마가 차려주는 밥보다, 아빠가 사다 주는 빵보다 더 소중한 게 생길 때가 올 거다. 여러 이유가 생기겠지만 집에 오는 것보다 혼자만의 아니 둘만의 공간이 더 소중해질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언제가 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조금씩 단련 중이다. 서운한 감정보다 건강하게 자랐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건강하게 키워낸 우리를 칭찬해주고 싶다. 그래, 떠나야 할 때는 말없이 질척이지 않고 보내줄테니 엄마 아빠 나이 들어 심심하지 않게 알아서 제때 찾아와 주면 고맙겠다. 어쩌다 혼자인 주말 오후 주저리주저리 적어본다. 

 

2023. 02. 0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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