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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Feb 21. 2023

장소가 사람을 만든다

2023. 02. 21.  07:05



부산 현장으로 출장 왔다. 당분간이라고 했지만 얼마나 있게 될지 예측이 안 된다. 담당자가 구해지지 않으면 당분간이 몇 달이 될 수도 있다. 기차 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여전히 불만은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다시 복귀해도 불만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첫날은 여독(?)을 핑계로 일 대신 분위기 파악만 했다. 현장 주변에 마땅한 숙소가 없었다. 택시로 15분가량 떨어진 호텔로 숙소를 정했다. 예전에는 번화가 모텔을 잡았다. 그저 하룻밤이니 저렴한 게 먼저였다. 모텔방에 들어가면 TV부터 켰고 밤새 봤었다.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것이었다. 출장 왔으니 글 쓰고 책 읽는 걸 하루쯤 건너뛰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허락했다. 드라마 정주행으로 밤을 새기도 했다. 그래봐야 남는 건 후회뿐이었다.

 

장소를 바꾸니 몸가짐도 달라진 것 같다. 별 몇 개짜리 호텔은 아니지만 있을 건 다 있다. 퇴근 후 제일 먼저 헬스장에서 30분 정도 뛰었다. 땀을 내니 몸도 마음도 개운하다. 마음의 앙금은 남았지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내가 애를 쓴다고 달라진 상황이 아니니 말이다. 점심은 10첩 반상으로 든든하게 먹었다. 저녁은 간단히 샐러드 한 그릇 했다. 나머지 시간은 TV도 보고 강의도 듣고 책도 읽었다. 모텔의 하룻밤과는 다르게 채웠다. 

 

모텔보다 5천 원 더 비싸다. 원래 1만 원 더 불렀지만 장기 투숙(4일)할 테니 조금만 깎아달라고 부탁했다. 당연히 회삿돈으로 지불했다. 비싼 곳에서 잤다고 잔소리하지 않겠지. 잔소리하면 기꺼이 토해내고 말란다. 첫날 저녁은 5천 원 이상의 값어치를 뽑았으니 말이다. 남은 사흘 퇴근 후 시간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주변에는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장소가 있다. 대표적으로 식당이다. 격이 없이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고, 온갖 격식을 다 갖추고 불편을 감수해야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도 있다. 어제 국밥을 먹던 사람도 오늘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나름의 격식을 차려야 한다. 장소에 걸맞은 행동이 그 사람을 말해주기도 하니까. 장소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태도가 달라지면 말투도 생각도 달라진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사람이 달라지는 데는 내부의 자각도 있지만, 외부 자극에 의한 변화도 있다. 장소는 물론 만나는 사람이 달라져도 태도가 변하는 경우도 있다. 변화의 불문율과 같은 명언이 있다. 경영 구루 중 한 명인 오마이 겐이치의 말이다.

"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은, 만나는 사람을 바꾸고, 사는 곳을 바꾸고, 시간을 달리 쓰는 것이다."


세 가지 중 하나만 바꿔도 변화의 출발선이 될 수 있다. 셋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이 바뀌면 당연히 장소가 달라진다. 가보지 않았던 곳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면 자연히 이전과 다른 행동과 생각을 갖게 된다.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면 시간의 내용도 달라진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중요한 건, 이 셋은 자기 안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사람을 만나고 장소를 바꾸고 시간을 달리 사용하는 것 모두 자신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 누군가 손을 잡고 끌고 다닐 수는 있다. 아무리 좋은 기회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쓸모없이 뒹구는 낙엽과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가치 있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 사치를 부린다기보다 돈을 가치 있게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여행을 가도 시설이 좋은 숙소에 머물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신선한 음식을 먹고, 자기 계발에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한편으로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 절제하고 규칙적인 일상을 지키는 이들도 있다. 저마다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어느 쪽이든 본질은 자기에게 중요한 걸 잃지 않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일상이 무너지면 모든 걸 잃는다고 한다.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은 돈이 새면서 결국 몇 십억 사고가 터지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굳은 결심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 비용을 지불할 용이도 필요해 보인다. 그 모든 행위가 결국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테니 말이다.


회사에 잔소리 들을 각오로 눈 질끈 감고 결제했다. 부산에 있는 동안에도 스스로 만든 환경 속에서 일상을 지켜야겠다. 욕먹을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건 그때 생각하고. 눈앞이 영도 앞바다다. 바다를 바라보고 글을 쓰는 게 오랜만이다. 장소가 바뀌었다고 글이 잘 써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바다, 배, 커피, 떠오르는 해, 음악, 이 모든 것들이 이 아침을 채웠다.  

 

2023. 02. 21.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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