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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Apr 26. 2023

중년, 중력을 거스를 용기가 필요할 때


26살에 독립했다. 학비도 생활비도 스스로 해결할 각오였다. 2학년 2학기 복학에 필요한 등록금은 부모님에게 받았다. 더는 손 내밀지 않을 결심이었다. 아침 8시부터 4시까지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꾸준히 다니면 다음 학기 등록금은 물론 월세와 생활비도 충분히 감당할 만큼의 월급이었다. 운이 좋았다. 병원 원무과 차트 관리 업무였다. 내원 환자가 몰리는 시간 말고는 지루할 만큼 한가했다. 그렇다고 책을 보거나 공부할 공간은 아니었다. 무료했지만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일하는 동안 지루했지만 학교는 달랐다. 새로 시작한 학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새 인생도 준비했다. 계획한 대로 졸업하면 남들처럼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을 거로 믿었다. 내 앞에 지나간 선배들 대부분이 그랬다. 졸업장의 위력은 대단했다. 학교만 잘 다니면 대기업을 뚫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보이는 걸 믿고 따라가려고 했다.


그때는 보이는 게 전부였다. 아니면 술자리에서 전해 듣는 선배들의 개똥철학이 최선이었다. 고민은 많았지만 누구 하나 명쾌한 답을 주지는 못했다. 고만고만한 때여서 누구의 대답이 정답이 될 수 없었을 테다. 그러니 판단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어떤 판단에도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 모든 고민에 시원하게 답을 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당시는 그만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내 주변에 없었던 것 같다. 만약 그때 답을 구할 수 있는 어른이 있었다면 아마도 삶의 방향이 조금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걷기 시작한 아이는 호기심으로 넘쳐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새롭다. 수시로 오감을 동원해 직접 경험하려고 한다. 넘어지고 다치고 혼이 나면서 차츰 성장해 간다. 유치원을 시작으로 초중고를 다니며 세상을 배우게 된다. 대학을 선택하든 그렇지 않든 20살이 되면 성인의 틀을 씌운다. 그들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2 막을 시작한다. 하지만 누구나 바라는 대로 원하는 삶을 살지는 못한다. 현실과 이상을 그제야 배우기 시작한다.


전공 선택은 물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함에 있어 지극히 현실주의자가 되고 만다. 돈을 기준으로 모든 가치를 결정하게 된다. 물론 안락한 일상을 바란다면 돈을 떼어놓을 수 없다. 최소한의 필요충분조건이 경제력이다. 그러니 이상을 좇기보다 피부에 닿는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순위가 된다. 결국 하고 싶은 일 대신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일을 선택하게 된다. 안타까운 건 이런 판단에 앞서 올바른 조언이나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안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해야 할 때라고는 하지만 항상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 또한 걷기 시작한 아이처럼 그 시기를 처음 겪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길을 잃은 기분일까?"

"내 인생은 왜 이토록 엉망진창이지?"

"왜 나만 정체된 걸까?"

《어른의 중력》 사티아도 일바이오크


2,30대는 어쩌면 사춘기보다 더 혼란스러운 시기일 수 있다. 부모의 그늘 없이 오롯이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고 해결하라도 내 던져진다. 기대는 건 어른답지 못하다 깎아내리고, 힘들다고 말하면 무시당하고, 쓰러지면 비난받는다. 나이가 그 사람의 정체성까지 완성시키는 건 아닐 테다. 모든 면에서 건강한 성인이 되라고 혼자 내던져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허리 같은 시기일 수 있다. 이때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중년, 노년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니 보다 건강한 청년기를 보내기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은 물론 보다 적극적인 태도도 필요해 보인다.


어른들은 인생이란 직업적 성공, 결혼, 자가 소유 같은 목표를 향해 올라가는 반듯한 계단 같은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저마다의 계기를 통해 깨닫는다. 성인기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인 시기라는 착각은 딱딱하고 고루하며 이성애 중심적인 성별 고정관념, 위례적인 인종 서열과 경제 서열에 기반한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과 위계는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암시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어른의 중력》 사티아도 일바이오크


50을 바라보고 있다. 또 다른 시작 앞에 섰다. 이전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만족스럽지 못했던 시기를 지나며 실수하고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에 뒤쳐 지 않으려 발버둥 친 덕분에 그나마 이만큼 살아냈다. 다만 조금 더 괜찮은 2,30대를 보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때 만약 주변에서 나를 붙잡아주고 조언해 주고 보듬어주는 존재가 있었다면 말이다. 조금 더 기대고 어리광도 부리고 궁금한 걸 물었으면 좀 더 단단한 성인이 될 수 있었을 것 같다.


중년의 지금이 청년기 때와 다른 점은 나를 지탱해 주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게 하나이고, 어떤 삶을 사는지 항상 들여다볼 수 있게 글을 쓰는 게 다른 하나이다. 냉혹하고 계산적인 현실을 바꿀 힘이 나에게 없다. 그렇다고 세상이 정해놓은 대로 살 수만도 없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2,3대를 희생했다면 생의 절반, 중년 이후는 다르게 살아볼 필요도 있다. 마찬가지로 중년도 서툴고 모르는 것투성이다. 살아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나마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에 기대 조금은 나은 선택과 판단을 내릴 수는 있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사티아도 일바이오크가 쓴 《어른의 중력》에서 불안정한 2,30대 시기를 '쿼터라이프'라고 정의한다. 이 시기의 20년은 인생의 1/4에 해당한다. '뚜렷한 특징이 있는 발달기로서, 고유한 지침과 충실한 안내가 필요하다. 가족의 압박과 자신을 향한 수치심으로 가득한 시기, 위기가 물밀듯 이어지는 시기로 쿼터라이프를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문제가 생긴다고 바로 의학적인 해결책을 써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분명 중요하고 어려운 시기는 맞지만 대안이 있고 저마다의 답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때 필요한 네 기둥, 즉 '분리', '경청', '구축', '통합'을 든다. 이 네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닌 삶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다준다.


"인생의 1/4 지점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중력처럼 눈앞에 닥친 세계가 무겁게 느껴지고, 그 거대한 무게와 하찮은 나의 고민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 사티아도 일바이오크


자신을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막막하고 비참한 현실에서도 자기만의 빛은 존재한다. 그 빛을 찾는 건 각자의 노력에 달렸다. 누구도 중력에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중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고만고만한 삶을 살 뿐이다. 쿼터라이프든 중년이든 한 번쯤은 내 의지대로 날아보는 삶을 꿈꾸는 건 어떨까? 설령 나는 시간이 몇 초에 불과하더라도 시도 자체로 가치 있을 테니 말이다. 환갑부터 청년기로 정의한다는 떠도는 말이 있다. 마흔 중반의 나는 유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자유와 가능성이 충분하다. 겁먹지 말고 내 선택과 나를 믿고 한 발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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