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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y 06. 2023

뺄수록 선명해진다, 문장도 인생도


좋은 문장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있다. 한 문장 안에 같은 단어의 중복이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계속 오고 있었고 오후까지 비는 계속 올 거라고 한다'에서 '비'와 '계속'이 중복된다. 이 문장을 다시 쓰면,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계속 오고 있었고 오후까지 이어질 거라 한다'로 중복된 단어를 뺄 수 있다. 초고를 쓰다 보면 중복될 수 있다. 퇴고까지 마친 글에도 중복이 있다면 이는 작가의 게으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단어 중복은 독자에게 읽는 재미와 가독성을 떨어트린다. 결국 작가의 게으름은 독자의 외면을 부른다. 단어 중복을 피하는 것도 문장을 짧게 쓰는 것과 닿아 있다. 결국 한 문장 안에 불필요한 단어, 즉 부사, 형용사, 중복을 덜어낼 때 문장 길이는 짧아지고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한밤중에 우리 삼 형제를 깨우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자다가 깨는 것도 싫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더 짜증이 났던 것 같다. 짜증이 났지만 내색은 못했다. 그저 졸음을 참아가며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미 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채 떠다니고 있었다. 옆에 계신 어머니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를 존중해서인지, 말릴 힘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때는 말리지 않는 어머니도 싫었다. 그저 어떤 식으로든 그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아버지의 주사를 그만 듣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고입 시험을 100일 앞둔 어느 저녁 처음 술을 입에 댔다. 두 살 많은 작은형의 권유였다. 그때 나는 작은형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희망했고, 선배 자격으로 나에게 백일주를 건넸다. 그때를 시작으로 30년 동안 술을 마셨다. 성인이 되면서 술은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시시때때로 핑계를 만들어 들이부었다. 적당히가 없었다. 친구 선배 동료와 어울려 마시다 보면 어느새 술이 나를 마셨다. 술이 가득 찰 때면 주사가 나왔다. 말이 많아졌다. 마른 정신에 못 했던 말을 술기운을 빌려 쏟아냈다. 나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격이 두 개 인걸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술에 의지했고 술자리를 통해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다. 말을 많이 한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나도 아버지처럼 한 말 또 하는 주사를 부리고 있었다. 그렇게 싫어했던 아버지 모습을 따라 하고 있었다.


술을 끊은 지 523일째다. 언제까지 안 마실지 실험하기 위해 날짜를 세고 있다. 하나만 생각하고 술을 끊었다. 매일 아침 제때 가볍게 일어나기 위해서다. 일어나서 출근 전까지 4시간을 사수하기 위해서다. 금주하는 날짜가 더해지면서 마시지 않아야 할 이유도 더 생겼다. 술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술 취해 아이들에게 늘어놓는 주사가 그랬고, 술을 절제하지 못하는 태도가 그렇고, 술에 의지해 스트레스를 풀어보려는 게 그랬다. 술 마시고 하는 행동 중 어느 것도 내 의지 대로인 게 없었다. 그러니 술만 끊으면 오롯이 내 의지대로 살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적어도 지금 내 인생에서 술은 문장에서 빼도 되는 부사이자 형용사였고 중복되는 단어일 뿐이었다.


단어가 중복되는 걸 알아챌 수 있는 건 퇴고하면 서다. 퇴고를 통해 문장 길이도 줄이고 불필요한 단어도 뺄 수 있다. 퇴고는 글을 다시 쓰는 거나 다름없다. 퇴고가 가능한 것도 엉망으로 쓴 초고가 있기에 가능하다. 우리 인생도 초고가 있고 퇴고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대로 산다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실수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게 된다. 그런 과정이 인생의 초고를 쓰는 시기라 생각한다. 한 번 실수하면 두 번 실수 않으려는 게 인간이다. 한 번은 실패할 수 있지만 두 번째는 다르게 살 수 있는 게 우리다. 실수와 실패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다시 써 내려가는 것이다. 저마다 살면서 알게 된 불필요한 것들이 있다. 지금의 나에게 술이 필요치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필요 없는 걸 과감히 지울 때 문장도 명확해진다. 인생에도 불필요한 걸 지울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https://m.blog.naver.com/motifree33/22309417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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