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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y 26. 2023

시작은 갓 구운 식빵이다


시작은 늘 망설여진다. 특히 해오던 걸 멈추고 다시 시작해야 경우가 결과에 대한 기대 때문에 더 그렇다. 조금만 더 하면, 이 고비만 넘기면, 막연한 기대가 선택을 방해한다. 멈추고 포기하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때로는 빠르고 대담하게 결정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50분 동안 쓴 글을 저장하고 새 글 쓴다. 10여 분 고민하다 시작한 글이었다. 쓸수록 내용이 산으로 갔다. 멈출 때를 못 찾고 꾸역꾸역 썼다. 억지로 쓰는 글은 결말이 안 좋았다. 주제도 흐리멍덩하게 시작했다. 그러니 글이 더 어색해졌다. 쓰다 보면 나아지겠거니 했지만 아니었다. 시작이 어색한 글은 결국 끝도 어색해지고 만다. 차라리 다시 시작하는 게 답일 수 있다. 정답은 아니어도 오답을 맞는 답이라고 우기는 것보다는 낫다. 시험을 보면 풀이가 막히는 문제가 꼭 있다. 막힐 땐 돌아가라는 말처럼 일단 풀 수 있는 문제를 먼저 푸는 게 요령이다. 시간에 쫓겨 답을 아는 문제도 풀지 못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래서 시험지를 두 번 보라고 조언한다. 처음은 아는 문제 모르는 문제를 구분하기 위해, 다음은 모르는 문제만 푸는 식이다. 그래야 풀리지 않는 문제에 시간을 더 할애할 수 있게 된다.


억지로 쓰다가 멈춘 글도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보면 이어 쓰게 되기도 한다. 시험 문제도 다시 풀려고 시도했을 때 답을 찾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멈추는 게 먼저인 것 같다. 풀리지 않는 내용을 붙잡고 있으면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된다.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도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작은 망설여진다. 이제까지 해온 것에 대한 미련도 시작을 못 하게 하는 이유이다. 조금만 더 하면 다음 내용으로 이어질 것 같은데, 조금 더 고민하면 풀이가 생각날 것 같은데. 막연한 기대 때문에 포기가 안 된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포기했을 때 또 다른 기회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는 포기도 시작도 비교적 쉬웠던 것 같다. 이전 직장까지 15년 동안 9번 이직을 했으니 말이다. 4년 다녔던 직장을 제외하고 1년도 못 채우고 그만둔 곳이 절반이었다. 문을 닫은 곳도 있고 내 발로 걸어 나온 곳도 있었다. 월급이 안 나오는 직장은 포기하는 게 맞았다. 상사와 다투고 뛰쳐나온 건 객기로 포장한 포기였다. 불안한 직장을 다니는 동안 늘 구직활동을 했다. 여기저기 이력서 보냈고 휴가를 가장해 면접 보러 다녔다. 그런 탓에 쉬는 기간 없이 새로 시작하는 기회를 계속 만들었다. 어쩌다 때가 안 맞아 3개월 정도 쉬었던 적도 있었다. 스스로 그만둔 건 무책임한 행동이다. 이를 두둔하고 싶지 않다. 다만 책임감 때문에 맞지 않는 사람과 불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그때는 판단했었다. 결과를 두고 보기보다 차라리 새로 시작하는 게 나을 때도 있다고 믿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잠을 포기했다. 잠을 포기하고 얻은 시간 덕분에 제법 많은 양의 글을 썼다. 이제까지 썼던 글이 쌓여서 책으로도 나왔다. 글 쓰는 시간을 늘리지 않았다면 낸 책도 적었을 거다. 잠을 줄인 탓에 몸이 부칠 때가 한 번씩 온다. 그럴 때면 늦게 시작한 게 후회가 든다. 시작이 늦었다는 건 포기를 망설였다는 의미이다. 미련이 남아서 포기를 안 했던 건 아니다.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다른 대안도 포기했을 때 보이는 것일 수 있다. 모든 시작에 앞서 포기가 먼저이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퇴직이나 이직을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불필요한 시간을 내려놓아야 기회가 생긴다. 불필요한 시간의 기준은 정하기 나름이다. 가치를 따져 포기하는 요령도 필요해 보인다. 그렇게 만든 시간으로 퇴직이나 이직을 준비한다면 시작이 불안하고 막연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시작하기 전에는 망설여지고 불안해도, 일단 시작하고 나면 서서히 안정을 찾게 되는 것 같다. 노력이 꾸준히 쌓이면서 불안보다 기대가 커진다. 기대가 커지면 자신감도 붙는다.


포기는 먹다 남은 시간이 지난 빵이다. 빨리 버릴수록 건강에 좋다. 시작은 갓 구운 식빵이다. 식혀가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 배도 채우고 씹는 재미도 준다. 한 끼 든든하게 채우면 또 다른 시작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https://m.blog.naver.com/motifree33/22310780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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