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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n 18. 2023

지하철 손잡이의 쓸모


유난히 거칠게 운전하는 지하철이 있다. 운행 시간에 쫓기는지 역과 역 사이를 거침없이 달린다. 속도가 빠른 열차는 정거장에 멈출 때 흔들림이 심하다. 두 손 놓고 서 있다가는 넘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을지로 3가에서 갈아탄 3호선 열차가 그랬다. 빈자리가 생기길 바라고 앉아 있는 사람 앞에서 서서 책을 봤다. 두 손으로 책을 잡았으니 남는 손이 없었다. 운행 중에는 두 발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어느 역인지 못 봤는데 열차가 멈출 때 몸이 휘청일 정도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아서 앉아 있는 사람 쪽으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직전에 손잡이를 잡아채 앞사람과 조우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몇 정거장 지나는 동안 빈자리가 제법 생겼다. 서있는 사람이 없으니 머리 위 손잡이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열차 안에서 손잡이에 의지해 중심을 잡는다.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빽빽할 땐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넘어지는 일은 없다. 사람이 적당히 많을 땐 어떤 손잡이를 잡을지 눈치 게임을 하기도 한다. 어쩌다 같은 손잡이를 잡으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손잡이는 늘 같은 자리에서 승객의 안전을 지켜준다.


까치발로도 손잡이를 잡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큰형이 겨드랑이를 받쳐 들어줘야 겨우 손잡이를 잡았다. 겨드랑이 손이 빠지면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다. 두 발이 허공에 떠 있는 게 불안했나 보다. 혼자 매달릴 용기는 없었던 것 같다. 큰형 팔에 힘이 빠질 즘에야 다시 내려왔다. 고만고만하던 때라 한두 번 매달리는 게 전부였다. 형의 힘을 빌려서라도 손잡이에 매달리는 건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때 손잡이는 어린 나에게 놀이 기구로 쓸모를 다했던 것 같다.


손잡이는 늘 같은 자리에서 서서 가는 사람의 안전을 책임져 준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쓸모를 다하는 중이다. 마흔여덟의 나는 어떤 쓸모가 있을까? 이제껏 지하철 손잡이처럼 꼭 필요한 역할을 해왔는지 생각해 봤다. 반반인 것 같다. 아니, 적당히였던 것 같다. 내 일에 최선을 다한 적이 없었다. 나와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핑계 대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능력을 개발할 욕심도 없었다. 남들보다 탁월해지고 싶은 열정도 없었다. 그저 시키는 일만 할 뿐 주도했던 적 없었다. 그러니 늘 자리가 불안했고 월급도 고만고만했고 불만만 가득했던 것 같다. 역량을 키워 인정받기보다 나와 맞는 일을 찾으려고만 했었다. 정작 찾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나의 쓸모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라 생각한다. 진작에 알았다면 지금 일을 더 잘했을 것 같다. 하지만 때를 놓쳤고 다른 선택을 했다. 마흔셋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새로운 쓸모를 만드는 중이다. 읽고 쓰기를 통해 나부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려고 매일 애쓰는 중이다. 시간을 달리 사용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다. 나의 성장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도 영향을 주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읽고 쓰기를 통해 변화해 가듯, 더 많은 사람이 읽고 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쓸모를 찾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하철 손잡이처럼 누구나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고 싶다. 내 또래 누군가 변화와 성장을 바란다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게. 때로는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주고, 때로는 의지할 수 있게 어깨를 내어주고 싶다. 혼자 잘 사는 건 의미 없다. 함께 잘 사는 게 진정 잘 사는 삶이라 생각한다. 이제까지 그저 그런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그저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아보고 싶다. 손때 묻은 손잡이가 반짝반짝 윤이 나듯 나의 쓸모가 많아질수록 번쩍번쩍 빛이 나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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