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형준 Jun 28. 2023

아빠의 새치를 보고 둘째가 울었다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아내는 욕실에서 둘째를 씻겼다. 씻고 나온 둘째에게 아내는 머리를 말리기 전 숙제를 끝내라고 했나 보다. 둘째는 내 머리맡에 엎드려 숙제를 했다. 잠결에 아내 목소리가 들렸다. 둘째가 이유도 없이 운다며 타박하는 내용이었다. 그 소리에 나도 깼다. 얼굴을 돌려보니 고개를 푹 숙인 둘째가 보였다. 정말로 울고 있었다. 나도 이유가 궁금해 물었다. 우는 목소리로 아빠의 흰 머리카락 때문이라고 한다. 아빠가 자기 때문에 고생해 흰머리가 많이 났단다. 그러더니 더 서럽게 운다. 아내도 나도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아빠는 고생과 상관없이 원래 흰머리가 많이 난다고 말했다. 농담을 섞어 여러 번 설명했다. 그러자 우는 걸 그쳤다. 둘째는 정도 많고 감수성도 예민하고 공감도 잘한다. 그런 탓에 아빠의 흰 머리카락에 감정이입을 했던 모양이다. 나도 우리 엄마 아들인데 이제껏 그런 공감을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첫째가 태어나면서 장모님이 육아를 맡아주었다. 8년을 함께 살았다. 장모님은 때마다 염색에 파마를 했다. 파마한 머리는 파마 전보다 조금 더 곱슬거렸다. 염색한 머리는 염색 전보다 조금 더 까맸다. 아마도 살가운 성격이 아니어서 자세히 보지 않았던 건 같다. 엄마도 수십 년째 염색을 했다. 장모님처럼 풀리지 않는 파마머리를 했고 흰머리가 보일 때면 주저 없이 염색했다. 한 집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염색 한 번 해준 적 없었다. 때가 되면 염색하고 파마하나 보다 싶었다. 염색과 파마가 당신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마흔이 넘으면서 새치가 올라왔다. 놔두면 백발이 될 정도로 많이 났다. 흰머리가 많아질수록 나이 들어 보인다고 주변에서 말했다. 40대가 40대처럼 보이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염색을 시작했다. 흰머리를 가려 제 나이처럼 보이고 싶었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새치 나는 속도도 빨라졌다. 나이 들면서 몸의 기능은 떨어져도 머리카락이 더디게 자라지는 않는가 보다. 느낌일 수 있지만 염색을 시작하고부터 새치 양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그러니 염색을 습관처럼 하는 중이다.


두 딸을 키우면서 자연히 외모에도 신경을 쓴다. 함께 다녀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최소한은 꾸미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내도 그러길 바라서 옷도 사 입히고 염색도 해준다. 가족을 책임지는 건 여러 면 이 있다. 생계를 책임지는 건 당연하다. 올바로 자랄 수 있게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도 함께 성장해야 한다. 내면의 성장도 필요하지만 외모도 중요하다. 단순히 보이는 겉모습이 아닌 건강한 외모를 유지해야 할 의무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모습에서 아이도 부모를 신뢰하고 스스로도 노력할 테니 말이다.


나이 들어 보이지 않으려고 염색을 한다. 제 나이로 보여야 건강해 보인다. 건강해 보여야 활기 있어 보인다. 나이 들수록 꾸미지 않으면 초라해 보인다. 아이들에게도 건강한 모습을 보여야 믿음을 줄 수 있다. 또 이왕이면 젊어 보이는 아빠를 원할 수도 있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철이 없었던 때는 후줄근한 모습의 엄마와 아빠가 창피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왕이면 잘 꾸민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당신들이라고 꾸미고 싶지 않았을까. 고단한 삶에 염색, 파마는 사치였을 수도 있다. 그럴 돈과 시간을 자식에게 쓰는 걸 더 가치 있다고 여겼을 테다.


지금 생각해 보니 부모님은 당신의 건재함을 염색과 파마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동네 미장원에서 2만 원 주고 한 파마는 1년이 넘도록 풀리지 않아서 한결같은 외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집에서 7천 원짜리 염색약으로 신문 깔고 비닐을 뒤집어쓰고 직접 해 보이며 당당함을 보여줬다. 나이 드는 건 막을 수 없지만 나이 들어 보이는 건 막을 수 있었을 테다. 그런 노력은 당신들이 건재하다는 걸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게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일종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둘째가 걱정하지 않게 내가 젊어 보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주말에는 둘째에게 염색을 부탁해야겠다.




https://brunch.co.kr/@hyung6260/713


매거진의 이전글 만나면 좋은 친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