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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Oct 10. 2023

아내옷에 기름얼룩이 보였다

큰딸은 거실에 엎드려 태블릿을 보고 있다.

왜 나와 있냐고 물으니 엄마가 온라인 수업 듣는다고 책상을 빌려줬단다.

휴일에도 강의를 하는구나.

온라인 수업이 일상이 되면서 쉬는 날도 없어졌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방문 여는 소리가 안 들렸나 보다.

가만히 지켜봤다.

시선은 화면에서 노트로, 손은 계속 움직였다.

가끔 이해가 되는지 고개도 까딱인다.

아니면 이해하는 척 까딱거리는 걸 수 있다.

어찌 됐든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잠시 뒤 눈이 마주쳤다.

눈인사 후 아내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도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있다가 올 것 그랬다.

저녁밥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거실 책상에 자리를 잡을까?

아니면 식탁에서 작업할까?

어디에 앉든 큰딸의 눈치를 볼 것 같다.

눈치 주지 않을 테지만.

이럴 땐 만만한 게 운동이다.

옷을 갈아입고 운동하러 간다고 집을 나왔다.


7시에 끝난다는 수업이 늦어지나 보다.

큰딸은 여전히 거실에 드러누워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물줄기 소리 사이로 아내의 말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수업이 끝났나 보다.

밥솥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기 코드도 뽑았다.

밥이 없나 보다.


1시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단다.

아마도 저녁 준비할 시간이 없었나 보다.

운동 가기 전 밥솥이나 한 번 열어볼걸.

불이 들어와 있어서 당연히 밥이 있을 줄 알았다.


씻고 나와 싱크대 앞에 선 아내와 마주쳤다.

멋쩍게 한 마디 했다.

"밥 해놓을 걸 그랬다."

아내는 괜찮다며 자장면이나 시켜 먹잖다.

나도 그러자고 했다.


배달시켜 놓고 아내는 설거지를 했다.

나는 젖은 몸을 말리려 선풍기 앞에 앉았다.

다리 근육을 풀어주려 폼롤러로 마사지를 하면서.

그 사이 아내는 거실과 안방을 오가며 정리 중이다.


안방에서 나오는 아내가 보였다.

아내는 표정으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말은 더더욱 아낀다.

겉모습으로는 어떤 상태인지 맞추기 어렵다.

짐작건대 수업이 꽤 만족스러운 눈치다.

과제를 해야 한다고 툴툴거리지만 싫지 않은 눈치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공부하는 게 기분이 좋은가보다.

'바쁜 살림에 늙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딱 맞는 요즘이다.


아내는 자기 일을 찾는 중이다.

그 일을 위해 2년째 공부 중이다.

공부를 위해 많은 걸 포기했다.


헐렁한 면티 한가운데 기름 얼룩이 유난히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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