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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an 19. 2024

막걸리는 탁해도 인생은 맑음

"아깝게 질질 흘리고 그래. 자기가 안 마신다고 막 다뤄도 되는 거야?"

막걸리 병을 손에 쥐어본 게 2년 만이었다. 거품이 안 나게 뚜껑을 열려고 했는데 손이 둔해졌나 보다. 두 번이나 질질 흘리는 모습을 아내에게 보였다. 두고 보던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타박했다. 나도 내가 어이없었다. 2년 넘게 술을 끊었고 그 사이 술병 만질 일이 없었다. 기껏 무알콜 맥주캔 따는 게 전부였다. 가뜩이나 거품 없이 막걸리를 따려면 잔재주가 필요한데 말이다. 한참 술 마셨을 땐 능숙했었는데. 감이 떨어졌다.


아내는 두부김치와 도토리묵무침을 안주 겸 반찬으로 내놨다. 정확히는 막걸리를 마실 작정으로 안주를 만들었다고 실토했다. 둘 다 안주로든 반찬으로든 손색없다. 나는 만들어주는 대로 먹는 편이라 잔말 안 하고 먹었다. 더군다나 호수공원을 두 바퀴(11km) 달리고 온터라 젓가락질이 빨라졌다. 두부김치와 도토리묵은 반찬으로 먹어도 술술, 막걸리 안주로 먹어도 술술 들어갔다. 나는 밥과 반찬으로, 아내는 막걸리와 안주로 배를 채웠다. 한 입으로는 계속 먹었고, 다른 한 입으로는 대화를 시작했다.


둘째를 데리고 수학 학원을 알아보러 다녀왔단다. 채윤이는 학원 원장님 이미지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내켜하지 않았다. 큰딸 친구가 4년 넘게 다닌 곳이라고 소개받은 터라 아내는 학원장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니 못마땅해하는 둘째가 더 마뜩잖았다. 둘째의 결심이 필요했다. 아니, 잔말 말고 다니라고 할 것 같다. 아내는 방학 동안 손 놓고 있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조만간 둘째의 하루 일과에 수학 학원이 포함될 거로 짐작된다. 부디 잘 다니길 바란다.


학원비는 일주일 3번, 한 번에 2시간씩 한 달에 30만 원이라고 한다. 학원을 두 군데 다니는 큰딸도 비슷한 금액을 매달 납부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원비도 올라갈 거라고 아내는 걱정했다. 대학원 공부를 괜히 시작했나 한숨 쉰다. 잘했다고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을 건넸다. 아내도 때는 잘 맞았다고 맞장구 쳐준다. 남은 막걸리를 비우며 점점 줄어가는 잔고에 기운이 빠진단다. 공부가 끝나고 적어도 3년은 더 고생해야 겨우 자리 잡는 게 현실이라 한다. 앞을 내다볼수록 깜깜한가 보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막걸리처럼.


막걸리를 세워두면 가루는 가라앉고 위쪽은 반대편이 보일 만큼 투명해진다. 2년 전 대학원 공부를 시작할 때 아내는 투명한 내일을 꿈꿨다. 물론 몇 년간의 고생은 각오했었다. 막상 맞닥뜨린 현실은 그때의 의욕을 꺾었나 보다. 한 학기 남은 지금 처음보다 지쳐 보였다. 2년이 지난 지금도 2년 전보다 나아진 게 없어서일 수 있다. 시간을 보낼수록 선명할 줄 알았던 내일이 탁한 막걸리에 가려 저 넘어가 보이지 않는 게 답답한가 보다. 세 잔 째 따르는 막걸리는 여전히 탁했다.


인생이 항상 맑지만은 않다. 알면서도 맑기만을 바라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구도 내일을 볼 수 없지만 희망마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사람이다. 나도 사람이라 지난 6년 동안 희망을 놓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준비해 왔다. 노력하고 애쓰는 만큼 성과가 빨리 나오길 늘 바랐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아내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랬다면 아내가 막걸리 마실 일도 줄지 않았을까. 조금 더 편히 공부에도 집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까지 희망 고문해온 게 아닐까 싶다. 아니어야 한다.


신나게 흔들어 속이 뿌연 막걸리병 너머를 볼 재주는 없다.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고 가라앉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다. 어쩌면 병에 든 막걸리를 빨리 마셔버리면 투명해진다. 그러고 나면 병 넘어가 보인다. 우리 옆에는 늘 내일에 대한 불안이 따라다닌다. 내일을 알 수 없기에 당연히 불안하다. 그렇다고 내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볼 수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불안을 안주와 함께 마셔버릴지, 아니면 가라앉기만 기다릴지.


정답은 없다. 저마다의 선택만이 옳을 뿐이다. 아내는 여전히 나를 믿는다. 나도 아내를 믿는다. 당장은 그저 그런 작가이자 강연가이다. 아내도 지금은 누군가의 보조 역할만 할 뿐이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시기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매일 각자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해야 할 일을 하면 적어도 오늘은 선명해진다. 오늘이 선명해지면 불안도 조금은 덜어진다. 이런 날이 차츰 쌓이면 어느 순간 더 맑은 내일도 우리 앞에 와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때는 나도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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