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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02. 2024

그래서 결국 글을 쓰게 된다

《내가 읽고 싶은 걸 쓰면 된다》다나카 히로노부

이 글을 쓰면서도 의문이 든다. 마침표를 찍은 글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겠다. 다 쓰고 난 글이 '영향'이라는 거창한 표현조차 붙이기 민망한 글이 될 수도 있다. 이제까지 쓴 글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각오로 쓰지 않았다. 그럴 깜냥도 안 된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썼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을 수 있다. 남에게 차마 말할 입장도 자격도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해주고 싶은 그런 말들 말이다. 그런 글을 왜 7년째 쓰고 있을까? 


뚜렷한 목적을 갖고 글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다. 일종의 허세로 시작했다.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게 다르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아마 섣불리 쓰려고 하지 않았을 거다. 허세만 잔뜩 끼었던 탓에 멋모르고 쓰기 시작했다. 헛바람은 쉽게 빠지기 마련이다. 얼마 못 가 바람은 빠졌고 탄력을 잃었다. 그제야 생각이라는 걸 했다. 이 길이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를. 제법 긴 시간 고민했다. 답을 찾기 위해 생각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결론 대신 글쓰기를 통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가능성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기간은 정해놓지 않았다. 대신 조건만 하나 붙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무엇을 썼는지 생각해 봤다. 나를 썼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나에게서 글감을 찾는 게 가장 쉬웠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장 어렵기도 했다. 나를 드러낸다는 건 용기가 필요했다. 그때 나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주저 없이 세상을 독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나에게 관심 갖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도 조건을 달고 시작했으니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앞만 보고 달리면 주변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글은 달랐다. 앞만 보고 글을 쓸수록 내가 더 보였다. 나에게서 글감을 찾아낼수록 그동안 몰랐던 나를 보게 됐다. 내가 나를 알아가면서 나를 다시 정의했다. 이미 알고 있던 단어도 내가 정의하기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이를 재정의라고 말한다. 나를 쓰는 건 나를 재정의하는 과정이었다. 재정의는 왜 필요할까? 우리는 재정의를 통해 이전에 가졌던 생각에 의심을 갖는다. 그동안 믿었던 것들에 의문을 품고 답을 찾으면서 조금씩 새로운 것들에 눈뜨게 된다. 내가 나를 쓰며 나를 알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나에 대해 쓴 글을 누군가가 읽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쓴 글에도 반응이 조금씩 나타나는 걸 보고 알았다. 놀랄 만큼의 반응은 아니었다. 그저 공감받고, 애정해 주고, 격려받는 정도였다. 대부분 긍정적인 신호였다. 만약에 반대의 반응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트집을 잡았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도 내 선택을 의심했을 수 있다. 틀린 길이었다고 멈췄을 것 같다. 다행히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처음 생각대로 내가 재정의한 것들에 대해 써가는 중이다. 처음부터 대상을 정하지 않았듯 여전히 마찬가지다. 살아온 환경, 경험, 나이, 성별, 가치관이 달라도 내 글에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늘 존재했다. 그들 또한 나를 통해 스스로를 재정의할 기회를 갖게 된 것 같다. 


글을 쓰면서 가장 신기했던 경험은 사람과의 연결이었다. 처음부터 연결을 의도하고 쓰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연결되었다.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덕분에 처음 선택에 의심 없이 7년 동안 글을 쓸 수 있었다. 이때까지 되돌아보면 나를 위해 썼던 글들이 누군가의 눈에 띄면서 그들과 이어졌던 것이다. 허세로 시작한 글이, 대상을 정해놓지 않았던 글이, 나를 재정의하며 썼던 글들이 결국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냈다. 그 인연들 덕분에 나 또한 이전과 다른 경험을 기회를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선순환이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의도된 만남으로 이어졌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기 때문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그래서 결국 글을 쓰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이다. 내가 읽고 싶어서, 나를 위해서 자료 조사를 한다. 그것을 글로 쓰는 행위가 인생을 즐겁게 해 주며, 갇힌 생각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난 와중에 이해하고 배우는 것 이상의 행복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내가 읽고 싶은 걸 쓰면 된다》본문 중)


여기까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나는 모른다. 7년 동안 썼지만 여전히 영향에 대한 평가는 내 몫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이제까지 써왔을 뿐이다. 내 글을 선택하고 읽고 무언가 영향을 받았다면 그건 오롯이 그들의 몫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느 순간부터 영향을 줄 수 있길 기대하며 글을 쓴다. 이왕이면 한 사람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물론 내 글을 읽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누구의 글이든 글을 통해 우리는 연결을 경험할 수 있다. 더 많은 연결로 이어질수록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나도 그렇게 시작했고 이제까지 이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누군가에겐 별 의미 없을 수도 있다. 반대로 나처럼 인생을 건 실험이자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도전일 수 있다. 누구의 정의가 옳다 그르다 따질 성질은 아니다. 그저 저마다의 가치관을 따르면 그만이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괏값은 달라진다. "당신이 읽고 싶은 것을 당신을 향해 써라. 그 결과, 당신은 누군가와 연결되고 인생이 바뀐다"라는 다나카 히로노부의 말에 그 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말대로라면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인지는 분명하다. 다만 이를 믿고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는 저마다의 선택일 뿐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짐작 건데 글쓰기를 선택한다. 그래서 결국 글을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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