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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30. 2024

살아보니 무지의 고통보다 배움의 고통이 더 낫더라

"배움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지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유대인 부모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이 말을 한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섬뜩하면서도 당연한 진리입니다. 이 당연한 진리를 48년을 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6년 전 책을 읽으면서 그전까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배워야 할 때 배움의 고통을 견디지 않은 대가를 치러왔습니다. 6년 전 스스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진작에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저는 제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전교 1, 2등 겨룰 만큼의 실력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반드시 성적과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스스로 호기심을 갖고 궁금한 걸 하나씩 알아가는 걸 말합니다. 지식을 쌓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경험에서 배우는 지혜에는 못 미치겠지만 적어도 사회에 나갔을 때 꼭 필요한 것들은 배우길 바랍니다. 배움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갖길 바랍니다.


하여,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모든 걸 선택하길 바랍니다. 그게 옳든 그르든 말이죠. 옳은 선택이었으면 한 발 더 나아갈 것이고, 그른 선택이었으면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게 있을 것입니다. 둘 중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단단한 기초를 가져야 하고, 그게 그때까지 배움의 고통을 견디며 얻은 것들일 것입니다. 무지로 인해 실수를 반복하거나 잘못된 신념을 갖거나 남 탓하는 태도는 안 갖길 바랍니다. 그것만큼 스스로를 망치는 것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살아봐서 잘 압니다.   


26살에 스스로 결정한 선택을 30살이 되어서야 후회했습니다. 4년 반 동안 매달렸던 사업이 하룻밤에 공중분해되면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나에게 제안했던 사장을 원망했었습니다.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만 믿고 버틴 시간이 후회됐습니다. 나는 무조건 잘 될 거라는 허무맹랑한 신념을 가졌었습니다. 대학 졸업장도, 자격증도 없이 빚만 남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차츰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누굴 탓할 게 아니라는 것을요. 26살에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섣부른 판단이었습니다.


당장 먹고살아야 해서 친구가 소개해 준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전공은 달랐지만, 하다 보면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믿음은 공염불로 그쳤습니다. 스스로를 믿었다면 그 증거를 보여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배움의 필요성은 알았지만 일이 바쁘다는 핑계 뒤로 숨었고 해낼 수 없을 거라며 자신을 의심했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먼저 포기해 왔었습니다. 이 또한 내가 한 선택이었습니다. 십수 년 그저 그런 직장인으로 살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배움에 너그러웠던 탓에 후회의 날들을 보냈습니다. 


무지의 고통은 이것 말고도 더 있었습니다. 후회와 원망이 클수록 배우지 않았던 저를 탓해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그 화살이 남에게만 향해 있었습니다. 정작 나에게는 관대했습니다. 이 또한 무지한 탓입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몰랐다는 말입니다.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불만만 많았을 뿐 바꿔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진작에 창피함을 알았다면 달라져보려고 시도했었을 텐데요. 어쩌다 시도는 했었습니다. 성과가 날 만큼 끈기가 없었다는 게 더 문제였습니다. 결국 그동안 내린 선택의 결과가 그때의 나였습니다. 


여러분은 배움의 고통의 견뎌냈나요? 여전히 견뎌내는 중인가요? 아니면 저처럼 무지의 고통을 겪고 있으신가요? 산에 오르는 과정이 꼭 숨이 넘어갈 만큼 힘이든 건 아닐 겁니다. 저마다의 속도와 체력에 맞게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오르면 됩니다. 배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내 수준에 맞게 내 가치관에 따라 폭넓게 또는 깊이 있게 배우는 겁니다. 등산도 공부도 순위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학교에서나 등수가 중요했지 인생을 사는 데는 별 의미 없었습니다. 살아보니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아침에 일기에 사람 사이에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을 적었습니다. 관계의 성격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게 달랐습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하나 있었습니다.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관계에서든 내 역할을 결정짓는 건 결국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입니다. 이 말은 아는 게 많고 깊을수록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100미터 달리기처럼 배울 게 아니라 마라톤을 달리듯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만의 속도대로 말이죠. 경쟁할 필요 없이요.


마빈 토케이어가 쓴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산이 하늘보다 더 높고자 해서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는 것처럼 유대인 부모들 또한, 자식들을 위해 더 높은 학문의 능력을 올리기 위해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유대인 학생들은 산봉우리처럼 높은 지식 능력을 갖춘 부모와 어깨를 겨룰 만한 높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평생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모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하고요. 내 아이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면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도 부모도요. 둘 중 당연히 부모가 먼저여야 합니다. 마흔 넘어서 책을 읽기 시작한 덕분에 늦게나마 이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믿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믿는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삶도 조금씩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중이고요. 배움의 고통을 이겨내면서 말이죠.


여러분은 지금 '배움의 고통'과 '무지의 고통' 중 어느 것을 겪고 있으신가요?




https://docs.google.com/forms/d/1qFfd2CX6opctG8sKVnfcsRxD8Ynq-5xoHn4Foqg4iNA/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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