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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복 Aug 12. 2018

시 쓰는 법학자의 산촌일기

커피-아메리카의 검은 눈물 끓어오르다

내가 ‘다방커피’로 불리는 믹스커피(봉지커피)가 아닌 블랙커피를 처음 마신 것은 유학을 가서다. 프랑스에 도착하여 호텔에 짐을 풀고 아침을 먹으려는데 난감하였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마침 호텔 가까운 곳에 빵집이 있어 들어갔다. 점원이 뭐라뭐라 말하는 데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그저 손가락으로 아무 빵이나 가리키고는 내가 아는 몇 마디 불어로 커피를 주문했다. “엉 카페, 실부플래(Un café, s'Il vous plaît!)-커피 한 잔 주세요.”


점원은 내게 돌덩이보다 더 딱딱한 빵 하나와 한 모금 홀짝 마시면 그만일 작은 양의 커피한 잔을 주었다. 잔에는 보기에도 진하고 새까만 색깔의 커피가 담겨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커피를 뜻하는 ‘카페’는 엑스프레소라는 것을. 처음 대하는 카페는 탕약보다 백배는 더 쓴맛이었다. 도저히 그냥 마실 수 없어 빵을 뜯고 찢어 조금씩 적셔 먹었다. 때는 1992년 1월 초 고단한 유학생활의 서막이 열렸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국제법을 전공으로 학문을 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때부터 어학학원에 다니며 뒤늦은 외국어 공부에 집중하였다. 당시 모교는 시내에 있던 캠퍼스(대명캠퍼스)를 도시외곽(성서캠퍼스)으로 옮겨 조성하는 중이었다. 법과대학도 옮겼는데 집에서 가까워 나로서는 다니기에 편하였다. 문제는 어학학원. 학원이 대구 동성로라는 시내 중심에 있다 보니 오히려 통학거리가 늘어나 버렸다. 오전 9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 6시부터 8시까지 수업을 듣고 버스를 타고 부리나케 다시 성서캠퍼스로 가야했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 5시쯤 첫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야했다. 늘 잠은 부족했고, 아침식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들깨가루를 우유에 태워 한 그릇 후루룩 마시고는 집을 나섰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대체할 수 있는 음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에 쫓겨 아침을 먹을 때마다 느끼는 고민이었다.


그 고민은 프랑스에서 생활하면서 단박에 해소되었다. 바게트는 바쁜 아침시간에 번거로운 한식 위주의 식사를 완벽하게 대체하는 음식이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불랑저리(베이커리)로 불리는 빵집에서 갓 구운 맛있는 빵을 살 수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 먹을 빵을 사와서 커피를 내려 먹곤 했다. 빵과 커피의 조화. 이 두 음식은 와인애호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마리아주’와 같았다. 고된 박사과정에 있었지만 나는 음악을 듣거나 바깥 풍경을 즐기면서 빵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하였다.


한국에 있을 때도 나는 소위 ‘찌지고 볶는’ 한식으로 차린 아침식사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그 음식을 준비하고 차리는 어머니나 형수들의 수고는 말한 것도 없고,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찌뿌듯한 몸과 멍한 머리로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밥을 먹는 것도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우느라 새벽에 일어나 나와야 하는데,  시동생에게 아침밥을 차려줘야 하는 의무감에서 잠을 설치고 일어나는 형수들에게도 미안했다. 어쩌다 형수들이 아침밥을 챙기지 못하면 어머니는 은근하게 며느리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게는 간편하고도 영양가 높은 ‘아침대용식’이 간절했다.     

                  

나는 30여년을 빵과 커피 한 잔을 아침식사로 먹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과일과 견과류의 섭취를 늘였지만, 빵과 커피는 그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다보니 엑스프레소와 같은 진한 커피보다는 연하고 부드러운 맛의 커피를 좋아한다. 한때는 카페오레를 즐겨마셨다. 진하게 추출한 커피에 따뜻하게 적당량의 데운 우유를 섞으면 부드러운 맛을 내는 카페오레가 된다. 하지만 식도염으로 위장 상태가 좋지 않게 되면서 즐기던 카페오레 마시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커피를 당장 끊기도 어려워 추출기로 내린 커피에 물을 태워 그 농도를 조절하여 마셨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지만 뾰족한 묘수가 없었다.


스타벅스와 같은 카페가 국내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소비자들의 입맛도 변하였다. 그동안 커피라면 당연히 믹스커피라고 알고 있던 소비자들이 원두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프랜차이즈 카페는 아메리카노를 내세우며 머신(기계)으로 추출한 진하고 강한 맛의 커피를 판다. 내가 아무리 커피를 즐긴다고 할지라도 대형프랜차이즈 카페가 파는 머신 커피(아메리카노)는 마시기에 부담스럽고 위장의 자극도 심하였다. 내게 맞는 커피를 직접 만들어 먹는 수밖에 없었다.  


커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여러 권의 책을 구해 읽었다. 그 중에 어느 작가가 쓴 일본 도쿄와 오사카의 카페를 방문하고 쓴 여행기가 있었다. 그 책은 일본의 많은 카페가 주인이 직접 내린 드립커피를 팔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드립에 필요한 기구를 그림으로 그려 드립커피를 내리는 순서를 설명하였다. 나는 실험정신이 강한 편이다. 어떤 일에 대해 결정을 내리면 곧바로 실행한다. 핸드드립커피 추출에 필요한 기구에 대해 검색하여 구입하고는 그날부터 실험실습을 거듭했다.


핸드드립기구는 간단하다. 볶은 커피를 가는 핸드밀과 유리로 만든 서버, 물 끓이는 전기(드립)포트와 드립주전자, 그리고 드리퍼와 필터만 있으면 된다. 이 기구세트를 갖추는데 몇 만원만 있으면 되니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이다. 여기에 본인의 정성과 수고만 곁들이면 자신만의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처음에는 카페에 가서 볶은 커피를 사서 썼다. 카페마다 쓰는 원두와 볶는(로스팅) 정도나 기법이 다르니 커피 맛이 일정하지 않았다. 또 어떤 원두를 쓰는지 의심스럽고, 가격이 비싼 것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커피를 직접 볶으려니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아파트에서는 난감하였다. 원두를 볶는 과정에서는 많은 연기가 난다. 아무리 창문을 열고 볶는다고 할지라도 그 매캐한 연기가 실내외에 가득 차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원두를 볶아 커피를 내리는 그 소박한 꿈은 팔공산에 들어와서야 이룰 수 있었다.


커피생두 판매 사이트에서 만 오천 원 정도만 주면 프리미엄급 원두 500그램 한 봉지를 산다. 시중 카페에서 80~100그램 볶은 커피 한 봉지가 대략 팔천~만 원이니 그에 비하면 여간 싼 게 아니다. 남는 일은 나 자신이 직접 원두를 볶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 가정용 로스팅기계가 있지만 나는 직접 볶기로 했다.


창고에 오랫동안 쓰지 않고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가스용 고기불판을 꺼냈다. 마당에 야외용 돗자리를 깔거나 2층 베란다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커피를 볶기 시작했다. 커피야 많이 마셔봤지만 로스팅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어느 정도의 열을 가해 어느 시점까지 볶아야 되는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떤 때는 너무 약하게 볶아 맛이 밍밍하였고, 다른 때는 너무 강하게 볶아 탄맛이 지나쳐 버려야 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차츰 나만의 감각과 노하우를 익혔다. 열과 시간, 그리고 볶인 상태와 감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제대로 된 커피 맛이 났다.


아파트에 살 때와는 달리 집을 지어 이사 오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나는 직접 볶은 커피를 내려 대접한다. 미리 손님의 취향을 확인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진한 커피 혹은 약한 커피, 어느 것을 좋아하세요?” 그 취향에 따라 커피의 농도를 조절하여 내린다. 다행히 커피를 맛본 손님들은 만족하고, 맛있다며 여러 잔을 마시는 이들도 적지 않다.


돈을 주면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가급적 내가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할 생각이다. 그게 전원생활의 재미고 묘미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비록 평생 정신활동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 한 잔의 커피가 담고 있는 땀과 눈물의 의미를 잊지 않으려 한다. 한 잔의 커피는, “몇 푼의 돈을 내고/ .../ 어떤 아비의/ 눈물을 사서 마시는 것”(졸시, <커피 한 잔> 부분)이니까.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별난 일이다


밤새 몽롱하게 내려앉은 의식을

깨우려 마시는 커피에서


숱한 세월을 버티고 견딘 뼈 마디마디

불거진 옹이로 침전된


썩은 거름 냄새가 나는 것은


쇠사슬에 묶인 자본이 내뱉는 구취와

감언이설이 섞이고 버무려져


거친 갈퀴로 굳어진 농부의

두 손 열 개의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씁쓸한 땀 냄새가 나는 것은


카페에 앉아 우아하고 고상한 자태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섬섬옥수 가녀린 여인의

두 손 열 개의 손가락에서 스며든


창백한 분 냄새가 나는 것은


내 자랑 네 자랑 하릴없는 수다로

따분한 인생이 식어갈 때


쉭 쉭 뜨거운 피 내뿜으며

아메리카의 검은 눈물 끓어오른다 (졸시, <커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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