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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복 Jul 06. 2019

[소선재 한담 1] 고통에 대한 인식과 성찰

종교와 학문은 존재가 느끼고 있는 고통(혹은 아픔)에 대한 인식과 성찰을 근본으로 삼는다.


붓다는 생로병사에 대해 인식하고 왕자로서 누리던 모든 평안과 환락을 던지고 나이 서른에 출가했다. 그로부터 온갖 수행과 고행을 거친 뒤에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었다. 이때 온갖 마귀의 달콤한 제안과 유혹이 있었지만 붓다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예수의 삶도 마찬가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지만 광야에서 40일간 헤매며 사탄의 방해와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고난과 시험을 통해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체계를 확고히 세운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고 한다.


붓다와 예수의 사례에서 보듯이 존재로 태어난 이상 모든 사람은 태어나 늙고 병들며 죽는다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마귀나 사탄의 유혹에 빠져 고통의 질곡에 빠질 수 있다. 붓다나 예수도 이 시험의 과정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붓다와 예수가 내면의 혼란과 갈등, 그리고 육신의 배고픔과 허기를 딛고 흔들림 없이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붓다와 예수가 ‘박제된 인형’이 아니라 우리의 스승이자 이웃, 부모이자 친구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디 종교뿐이랴. 학문은 물론 인간사회의 모든 정치와 제도는 인간과 사회가 겪고 있는 고통(혹은 아픔)에 대한 인식을 그 근본으로 삼는다. 이것을 인권과 결부시키면 소위 ‘인권감수성’의 문제이다.


우리가 타인이 가지고 있는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공감할 수 없다면, 이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할 것이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사회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가진 이들이 온갖 특권을 누리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을 핍박할 것이다. 만일 학문이, 정치와 제도가 후자들이 아니라 전자들을 위할 목적으로 운용된다면, 그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남의 어려운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단()의 첫 번째 덕목으로 인간의 본성에서 절로 발현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 마음을 잃어버린 듯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임은 물론 분노에 휩싸여 혐오로 가득한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인식하고 성찰한다 함은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태어났으므로 서로를 존중(상호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보다 높은 관심과 배려는 가진 자들의 도덕적 의무이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이 너무 아파하지 않기를, 행복하기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20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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