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재 한담 5(1)] 나는 속세로 출가했다!
나는 속세로 출가했다!
스무 살쯤 되었을까? 출가하여 평생 올곧게 수행승의 삶을 살 자신이 없던 나는 붓다의 속가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춘기 방황이 극심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 학창 시절 동안 실천할 세 가지 계획을 세웠다.
하나. 문예반에 들어간다.
둘.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셋.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입산 출가한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그 당시로서는 제법 진지했다. 입학하자마자 <근일점문학동인회>에 들어갔으니 첫 번째 계획은 곧바로 성사되었다. 당시 문학청년(문청)은 지금의 아이돌만큼은 아니지만 또래 여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나를 ‘오빠’로 믿고 따르던 후배들도 여럿 있었고, 그 중에 마음이 가는 동생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굳건히 먹고 적당한 거리를 두며 만났다. 그러다 남들은 대입공부에 골몰하는 고3때 나는 또래 K를 만나 그만 사랑 놀음에 빠져 버렸다. 자연스레 두 번째 계획 실천 불가! 세 번째 계획은? 만일 입산 출가하여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겠지.
고등학교 3년 동안 여러 절을 찾아 떠돌았다. 고1 여름방학 때는 어느 절에 갔다가 도학스님이란 또래의 비구니스님을 만나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사연은 그해 가을에 열린 <문학의 밤>에 수필로 써서 발표했다. 하지만 내가 입산하여 출가승이 되겠다는 마음을 접은 결정적 계기는 겨울에 찾은 산사가 주는 황량함과 수행승들의 고단하고 엄격한 생활 때문이었다.
큰절이야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도 많고 스님들의 생활도 큰 불편이 없다. 암자나 말사의 상황은 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스님들은 물론 신도들의 발걸음이 끊어진 암자에는 하얀 눈만 가득 쌓여있고, 모든 방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배를 쫄쫄 굶고 길을 헤매다 겨우 본사로 내려와도 공양시간이 지나면 밥 한 톨 먹지 못했다. 대중들이 머무는 방에서 허기진 몸으로 겨우 잠들만 하면 새벽 예불을 알리는 도량송이 울려 퍼진다.
절의 하루는 환한 아침이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으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벽에 시작된다. 한 번씩 지켜보고 경험하는 승려들의 산중생활은 자유와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생활을 지배하는 규율은 엄격하다 못해 숨이 막힐 듯 했다. 출가하여 승려로 살 요량이면 속세에서는 마음먹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겠다는 약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리되지 못한 생각에다 행색은 엉망인 채로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어디 갔다 왔냐?” 묻지도 않고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과 시원한 동치미 한 그릇을 내주었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면 괜스레 어머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또 다시 허공에 발을 디딘 듯 방황의 세계를 떠돌아 다녔다. (2019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