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인가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직장생활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이 말을 잘 이해할 것이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의 은촛대 사건 같은 것은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나'도 변하기 어렵지만 '남'은 더 어렵다. 오늘까지 나를 죽도록 괴롭히던 스크루지들은 내일도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기업에서 채용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든지간에 적절한 교육을 통해 원하는 인재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나 다름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 회사에 맞는 지원자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훌륭한 교육관을 뽑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육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육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성향'이라고 하는 부분은 왠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노력으로는 절대 변화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쉽게 말하면 감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고구마가 될 수 없다.
그 사람 변했어.
그런데 이 말 또한 사실이다. 꼭 부정적인 맥락에서만 살필 필요도 없다. 예전에 분명 그냥 평범했던 것 같은 사람이 오랫만에 만났을 때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꽤 많다. 그 동안 나는 뭐했나 하는 생각에 조금은 우울할 수도 있고, '오호라, 나도 노력하면 변할 수 있겠군' 하는 건강한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가만히 앉아 자신을 돌아보면 살아온 동안 이미 꽤 많은 것들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게 모르게 능력치가 꽤 상승한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큰 일이다). 어리버리하던 신입 시절에 며칠 동안 삽질하던 것들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몇 시간이면 뚝딱 처리할 수도 있다. 말을 해야할 때와 입을 다물고 있을 때도 구별하고, 실수를 했을 때 최소한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그 싸한 기운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감자는 고구마가 될 순 없지만,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삶아서 그냥 먹는 것보다는 소금을 찍어 먹으면 더 맛있고, 채 썰어서 기름에 튀겨 먹으면 더 환상적이다. 그러다가 맥주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면 세상에 운명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고, 변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부분이 변하지 않고 어떤 부분은 노력을 통해서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다.
감자는 고구마가 될 수 없지만, 사실 감자가 고구마가 될 필요도 없다. 감자는 감자고 고구마는 고구마다. 그냥 서로 '다른' 것이다. 감자 입장에서는 고구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자신의 가치를 더 올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 된다. 감자조림도 맛있고, 매쉬드 포테이토도 맛있고, 짭짤한 포테이토 칩은 예술이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재료와 같이 어울리는가에 따라 감자의 가치는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이건 고구마도 마찬가지다. 감자가 부럽다고 자신을 기름에 던질 필요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튀김은 감자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튀기지 않고 굽는다면 감자보다는 고구마가 훨씬 맛있다. 뜨거운 껍질을 살살 벗기면 노랗게 드러내는 달콤한 속살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물론 고구마를 맥주와 같이 먹는 사람은 없겠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떤가. 튀긴 감자와 맥주는 하염없는 뱃살을 부르고, 삶거나 구운 고구마는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주지 않는가. 심지어 고구마는 만사 귀찮을 때 그냥 생으로 먹어도 맛있다. 설마 감자를 생으로 먹는 사람은 없겠지.
오히려 더 중요한 부분은 '나'는 감자인가, 고구마인가 하는 것이다.
의외로 현실에선 내가 감자인지 고구마인지 아는 것이 쉽지 않다. 누가 딱 꼬집어 말해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잘못 말해주는 사람도 많다. 더 어려운 것은 세상에는 감자와 고구마만 있는 것도 아니란 점이다. 땅 속에서 자라고 뭔가 둥그렇고 토실토실하고 갈색인 것이 감자인 줄 알았는데 토란일 수도 있다. 기름에 튀기면 왠만한 것들은 다 맛있어 지는데 토란은 예외다. 고깃국에 들어가 푹 삶아질 때까지 그 비싼 토란은 자신을 인생의 낙오자로 생각할 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답을 모른다는 것이 꼭 난감한 상황은 아니다. 어쩌면 즐거운 일일 수도 있다. '나'는 나를 삶아도 보고, 튀겨도 보고, 으깨도 보고, 소금도 찍어보고, 후추도 치고, 스테이크에 곁들이고, 맥주잔도 기울이면서 어떨 때 내가 맛이 나고 어떨 때 망해버리는지를 하나씩 알아가면 된다. 그 경험들이 쌓이면 '아하, 나는 감자였나 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 빨리 알고, 어떤 사람들은 한참을 늦게 안다. 그런데 이건 빨리 맞추기 게임 같은 것은 아니어서 늦게 안다고 해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빨리 알았다고 해서 으쓱해할 필요도 없다. 감자가 감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슈퍼감자가 된다거나 KS 인증마크 같은 것이 붙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다만,
'나는 누구일까, 어떻게 하면 더 맛나게 될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궁금해하고 실험하면서 언젠가는 꼭 알아내고 말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매우 크다. 세상에 그런 것은 필요없다고 어차피 죽으면 다 그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뜩이나 무료한 삶에서 즐겁게 풀어가고 싶은 퍼즐 하나를 놓칠 이유는 없겠다.
모쪼록 감자든 고구마든 출생의 비밀을 풀어가며 생긴대로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